
Introduction. 성소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길이 열려 있음을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길이 성소에 있사오니 우리 하나님 같이 위대하신 하나님이 누구오니이까”(시 77:13, KJV). 또한 그 길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바로 그 분이십니다.
이 길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신 그 길입니다. 창세 전에 시작되어 지금도 온 인류를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이 놀라운 구원의 가르침인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고 하신 그 길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 모두가 정확하게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속히 오라는 주님의 초청을 깊이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라며 함께 성경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I. 성소의 원형이신 예수님
A. 제사와 성소 봉사
B. 성소에 대한 주제의 중요성과 연구 방법
C. 하늘 성소에 대한 이해
D. 나의 몸값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표현하는 속전의 의미
II. 성막 뜰
A. 나의 모든 길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상징하는 세 휘장문들
B. 번제단
C. 물두멍
A. 제사와 성소 봉사
제사 드리는 일은 에덴에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계속되어온 일입니다. 제단의 뿔들에 바르거나 휘장 앞에 뿌리거나 지성소의 법궤 앞에 뿌린 피는 계속적이고 상징적인 봉사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죄와 제사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희생 제물을 드리는 자가 죄를 고백하면서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매일의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직분의 제도를 통하여, 특별히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드리는 대속죄일의 의식을 통하여 죄의 용서와 중보, 화목과 구속의 원칙들이 전수되어 왔습니다. 이 모든 의식과 교훈들을 통해 우리들은 우리의 죄를 친히 지시고 위하여 돌아가셨으며 그분의 매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하여 깨닫게 됩니다.
성소 봉사는 분명히 상징적이었고 일시적이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수송아지나 염소의 피와 죄의 용서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희생 제물들은 모두 표상적이었으며 그 희생 제물 자체에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장차 올 더 좋고 나은 것의 예표와 그림자가 되었으며 중요한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죄의 심각성, 자복의 필요성, 율법의 위대함, 하나님의 거룩함,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필요한 준비, 이렇게 중요한 실제적인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될 때 이 깨달음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성소를 세우신 목적 –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넌 후 부른 그의 노래에서 말하기를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7)라고 했습니다. 이로 보아 모세는 이 성소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이름 또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23)이 아니셨습니까!
지상 성소의 원형인 하늘 성소(히 8장 참조)에서 인류를 위하여 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십자가 사건과 함께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여 하늘에서 완성하실 일도 그분의 죽으심으로 시작되었기에 그러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히 6:20)신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나온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비치는 이 빛, 칭의는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깨달음으로 성화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그곳을 통해 구속의 신비를 더욱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하루의 삶을 성소와 더불어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소를 중심으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무엇으로 어떻게 지으며, 어느 때에 어떻게 섬겨야 할 지를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이 성소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이 빛은 예수님을 통해 더 크고 환한 정오의 빛으로 지금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이 빛을 통해 우리는 현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시는 기도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진과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
성막 주위로 질서 있게 배치된 백성들의 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각 시대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당신의 백성들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는 모본으로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예배로 결속되어 있었으며 단 한 분 하나님과 하나의 위대한 희생 제물과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모두를 위한 한 가지 목적과 모두가 바라고 있는 약속의 땅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활했던 광야는 시선을 끌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으며 그들의 주위에는 늘 그들을 위협하는 다른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이 있었으며 그 중앙에 예배하는 장소와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성소)로 말미암아 그들은 주위의 환경, 즉 죄의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계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면이 둘러싸인 성소의 뜰과 상징적인 기구들, 희생제물과 절기들을 통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계시하는 도구로 성소를 위한 모든 설계도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계시의 중심은 구주의 중보와 봉사를 친히 대표하는 대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통해 바울은 성소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하늘 성소에서 인류를 위하여 탄원하는 중보자와 심판자로서 서게 되실 것과 또한 당신의 생명을 주는 보혈을 통한 전능하심이 모든 회개하는 영혼을 사단의 속박과 영원한 사망에서 놓여나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당신의 백성들 앞에 계속적으로 제시하기 위하여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매일의 삶의 중심
광야에 머무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장막이 어느 곳에 설치되든지 바로 그들의 진영 중앙에 성막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성막의 경내는 그들의 모든 세속적인 활동과는 분리되어야 하였으며 성막을 거룩한 울타리로 둘러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장막은 넓은 공간의 주변에 치도록 하셨으며 이곳에서는 아무런 세속적인 일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광장 안에 훨씬 더 작은 지역이 성막의 “뜰”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곳은 그분의 정부의 중심임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행군시에 그들은 언약궤로부터 일정한 간격(2,000규빗)을 두고 행진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수 3:4). 중앙에 있는 성막과 더불어 백성들은 죽지 않도록 “성막 주위로부터 떨어져 있어야”(민 2:2 참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당신의 백성들과 가까이 있기를 갈망하실지라도 그분께서는 오직 당신의 거룩한 위엄과 그들의 연약한 죄된 본성이 허락하는 만큼만 가까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계획이, 인간과 친밀하게 되기를 구하실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영원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백성들 앞에 항상 제시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셨습니다.
죄의 환경으로부터 분리
여호와께서는 당신께서 에덴동산에서 하셨던 것처럼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창 3:8)가 진중에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이 거룩한 구역은 진영 전체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정결하게 보존되어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기에 그들 모두는 그 자신과 주변을 정결하게 보존할 신성한 책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의무에 부주의하거나 게을리해서는 안되며 모든 생활 면에서 청결을 유지하여야 했습니다. 단정치 못한 것이나 건전치 못한 것 곧 순결한 분위기를 더럽힐 그 어떤 것도 그들과 그들의 주변에 허락지 말아야 하였습니다.
성막의 뜰과 오직 하나의 문
뜰을 두르고 있는 것은 세마포로 만든 세마포 휘장입니다(출 27:9). 성경에서 세마포는 구주의 “의”를 상징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성막을 두르고 있는 이 세마포 휘장을 통해 들려 오는 성령의 음성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간곡한 초청의 음성이셨습니다.
이 뜰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막 동쪽 편에 나있는 하나의 휘장 뿐이었습니다. 이 문은 “천하 인간”(행 4:12)에게 주신 구원을 위한 단 하나의 문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오직 하나의 문이며(요 10:7~9), 우리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히 12:2) 바로 그분이십니다. 백성들의 뜰로 불리워진 뜰의 동쪽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의식들이 행하여졌습니다. 번제단의 불은 희생 제물을 살랐으며, 대야의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였고, 희생의 피는 잃어버린 자를 구속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의식들은 죄를 제거하고 칭의를 얻기 위하여 행하여지고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성막은 네 개의 황금 기둥에 매달린 휘장에 의하여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성막의 바닥은 마른 땅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겸비하심에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하여 땅 가까이에 당신의 성소를 세우셨습니다.
성막의 운반
성막은 쉽게 해체하고 다시 세울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40년 광야 생활 동안 성막은 50여 곳에서 해체되고 세워졌습니다. 낮에는 서늘한 구름과 밤에는 따뜻한 불로써 하나님께서는 언제 출발하고 어디서 멈추어야 할 지를 백성들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어떻게 누가 성막의 기구들을 운반하는지에 관해서와 열두 지파가 행진하는 정확한 순서도 직접 정해 주셨습니다. 구름이나 불 기둥이 멈추는 곳은 어디든지, 언제든지간에 그곳에 정지하여야 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을 바라보면서 성막을 세우고 뜰을 측량하고 거룩한 광장을 정하고 끝으로 레위인들과 열두 지파의 위치를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이고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이 시대의 우리의 삶에 세워진 모든 계획들도 그리스도의 계획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B. 성소에 대한 주제의 중요성과 연구 방법
우리들은 성소에 관한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현 위치와 시대 시대마다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칭의, 성화, 영화)을 깨달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빛에 비추어서만 우리들은 우리의 실체를 눈으로 보고 알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들은 이 시대에 필요한 믿음을 활용하는 일에 큰 부족이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우리의 위치를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히브리서 참조)에 관한 문제들은 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아주 중요한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이 가까운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다른 어떤 시대의 사람들에게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충분히 연구하고 깨달아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능히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진술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하늘 성소에서의 승리의 봉사를 히브리서를 통해 생생하게 진술하였습니다. 이 일은 그가 지상 성소에 대하여 충분히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성소의 표상들을 이행하신 일에 대한 그의 진술은 오로지 구약을 통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분명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의 진술들은 먼저 있은 구약의 빛으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구약(지상 성소)과 신약(하늘 성소)을 통해 모아진 가르침들은 성소를 통해 전해 주고자 하는 구원의 계획을 밝히 비춰주는 큰 빛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받으시기 전후에 침례 요한에 의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두번씩이나 언급되었습니다(요 1:29,36). 아무 이유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 보십시오. 그것은 어떤 의미를 우리 마음에 불러 일으킬까요? 하늘 아버지께서 세상을 위하여 죽도록 내어 주는 부드럽고 친절한 우리 구주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는 성소를 연구함에 있어 이런 거룩한 상상력을 모든 표상과 상징들에게 적용시켜 볼 것입니다. 이 거룩한 상상력을 통한 연구는 우리들을 현실적으로 성소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경험케 할 것입니다. 모세와 이사야와 우리 구주께서는 희생제물인 어린 양에 대해 세밀한 주의와 관심을 돌리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모든 종류의 희생물에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은 순결하고, 어리고, 흠이 없어야 하며 “천산의 양떼”의 주인이신 큰 소유주에 의해서 값없이 제공된 것이어야 하였습니다. 어린 양은 자발적으로 죄를 뉘우치는 자에 의해서 제단에 바쳐졌으며 그는 그것을 줄로 묶어, 땅에 내던져, 진흙 속에서 그의 온 무게에 짓눌리게 합니다. 그런 다음 신중하게 그의 무력한 대속물을 도살합니다. 우리들이 도살하는 칼날 위에 태양의 번쩍임을 인식하게 될 때, 그리고 그 몸서리치는 죽음의 고뇌와 목구멍으로부터 흘러내리는 피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의 거룩한 상상력은 우리들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취급하였는지에 대해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줄 것입니다. 이처럼 성소의 표상과 상징들 속에 깊이 새겨진 사상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 행하는 실체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상상력만이 요구되어 집니다.
이 같은 마음의 상상력은 성경 기자들의 펜에 의해서만 나오지 않으며, 그런 감정 또한 그들의 말만 가지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기록된 문자보다도 훨씬 더 힘있고 웅변적인 표현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불어 넣어주어야 일어나게 됩니다.
성경의 사상들은 실제적으로 내 안에서 구체화 되어져야 합니다.
밝게 비춰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모든 구체적인 사항들이 마음속에 새겨지기까지 우리들은 하늘 성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일례로, 희생제도의 의미가 밝히 드러나게 될 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사상이 실제로 우리들의 가슴을 저미도록 아프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의 죽음을 죄 없는 희생제물이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죄를 포함해서 세상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무죄하신 구주께서 우리 때문에 갈보리에서 고통 중에 돌아가셔야 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에 실제적인 사건으로 각인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갈보리에서 보여진 큰 사랑을 느낄 때에 실제적으로 우리의 죄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흔들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죄를 가증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막을 척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진정한 모본이시며 그분의 자아 희생적 삶은 우리 삶의 모본이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모본이 거의 연구되어 지지 않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생각이 깊은 신앙인이라면 건물과 기구와 제사장 직분과 의식과 같은 사건들 너머로 구주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시 29:9)라고 외쳤습니다. 에스겔의 성전에서 하늘의 감독자가 사용하고(겔 40:3 참조), 하늘 성전을 척량하도록 요한에게 전달되었던 거룩한 척량 “장대”(계 11:1,2)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장대”로 불리워지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rod)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다”(사 11:1, KJV), “너희는 매(rod)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 지니라”(미 6:9, KJV). 우리는 그분의 생애와 봉사를 척량자로 성소의 의미를 척량하며 우리 자신의 삶 또한 거룩한 척량자로 척량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에 의하여 단련되고, 사전과 문법과 문맥에 의하여 훈련 받고, 역사의 통찰력과 지리와 계시된 과학적 사실에 의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우리의 통찰력은 낱말의 명료한 의미를 더욱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
C. 하늘 성소에 대한 이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오늘날 예수께서 하고 계시는 하늘 성소에서의 봉사에 대한 이해는 이 시대의 우리가 정확히 알고 깨달아야 하는 이 시대를 위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제사장과 대제사장으로 봉사하고 계시며, 거기에서 당신의 속죄의 희생의 공로를 당신의 백성들의 필요에 적용시키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같은 하늘 성소의 봉사는 구약의 성막을 통하여 분명하게 예증되어 있으며 예수님은 거기에 나타난 모든 상징과 표상의 성취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이 하늘에 있는 성소의 존재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 성소
구약과 신약 기자들의 일치된 증거는 하나님의 처소는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홍수 직후에 “번제”(창 8:20~22)를 드렸습니다. 이 번제의 히브리 이름은 그들의 선물이 마치 탄원과 찬양 중에 여호와께 도달되는 것처럼 연기가 되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바벨탑 건축자들의 영적 상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하늘 높은 곳에서 “강림”하셨다고 창세기 11장 5~7절에 나와 있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상태를 조사하실 때도 그분께서 친히 살펴보고자 “내려”오셨다고 창세기 18장 16~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야곱의 꿈 이야기에서도(창 28:12~15) 높이 들린 어떤 곳에 좌정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감을 받은 시인들은 종종 “하늘의 하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늘의 하늘”은 가장 높은 곳, 바울이 “이끌려”갔던(고후 12:4) “삼층하늘”이나 “낙원”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그곳에 위치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계심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실제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장 22절을 통해 주님께서는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욥 22:12)고 물었으며, 이사야는 “하늘은 나(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사 66:1 비교 행 7:48,49)이라는 사상을 확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 중에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마 5:34)라고 확언하셨으며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구주께서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계 3:12)와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의 수도가 될 것(계 21:10)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세상 역사 마지막에 대한 묘사에서 요한은 “큰 음성이(하늘) 성전에서 나서”(계 16:17) 은혜의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한은 마지막 날의 징조들 가운데 하나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려 지성소 안에 있는 증거궤를 모든 사람이 보게 되는 광경을 묘사하였습니다(계 11:19). 이것은 성령께서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을 읽은 독자들의 마음을 의도적으로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로 인도하고 계심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의 의미
히브리서의 연구나 다양한 영어 번역서들을 통해 우리는 “거룩하다”라는 히브리어는 지금 히브리어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 “성소”로 번역되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20: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시편 20: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이러한 표현은 항상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연결되어 사용되어졌으며 율법에 기초된 보좌는 그분의 하늘 성소 안에 있고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궁핍한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서 경배”하라는 말씀에는 이 사상을 계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시 29:2,9,10,….). 성경 난외주에 “거룩함”은 성소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선배들의 조언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편 기자들은 자주 찬양하는 자들의 마음을 위로 향하게 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여호와께 초점을 맞추게 하는 언어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경배의 중심이며 또한 심판의 중심인 하늘 성소
다윗은 시편에서 지상 성소의 목적에 대한 그의 이해는 하늘 성소에서 행하시는 그분의 사업에까지 다다른다는 사실을 기쁘게 증거하였습니다(시편 18편 참조). 또한 시편 9편에서는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조사 절차에 대하여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9:7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시편 9: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선지자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는 하늘 성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렘 17:10~12 참조)이라고 선언하였고, 미가 선지자는 “주께서 당신의 하늘 성전에서 악인에 대해 증거하시며, 당신의 심판을 실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내려오시는”(미 7:7~9 참조)것으로 말함으로써 구속의 과정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늘 성소의 표상인 지상 성소
솔로몬 왕은 그의 성전 봉헌 기도에서 주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그곳으로부터 도움을 베푸실 하늘 성소로 그와 백성들의 생각을 높였습니다(왕상 8장 참조). 그리하여 솔로몬 왕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지상 성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에 집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하늘 성전의 “문”으로부터 흘러나와 이 세상의 사막으로 흘러 들어가는 치료하는 은혜의 강에 대한 이상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겔 47장 참조). 이 생명을 주는 시내는 회복과 풍부한 결실을 가져다 주었으며 마침내는 달마다 열 두 가지의 다양한 과실을 맺는 생명나무에 물을 대주고 있음을 에스겔 47장, 요한계시록 22장의 이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상은 또한 성소에서 예시된 대로 메시야의 봉사를 묘사하였습니다. 지상 성전의 상징적 희생 제물과 표상적 제사장 기능은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실체를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시는 그리스도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 처음 일곱 장에서 모세의 성막의 교훈과 그 제사장 직분을 주의 깊이 회고하였으며 8장에서는 자신이 경험한 성소에 대한 더 풍성한 이해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과 그분께서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닌 참 장막”(히 8:1,2)에서 행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옛 언약에도 지상 성소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며(히 9:1) 그 성소의 제사장들은 단지 대표자, 곧 하늘에 있는 실체의 “모형과 그림자”(히 8:5)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모세의 성막의 상징들은 희생제물이요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봉사에 대한 직접적인 예증이라고 설명하며 그분이 바로 죽어가는 각 희생물과 중보하는 제사장의 모든 행위에 의해 묘사된 실체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스가랴는 오래 전에 왕이신 메시야께서 하나님의 하늘 성전에서 제사장일 뿐 아니라 재판장으로 세움을 입으실 것을 예언하였으며(슥 6:12~15) 구주께서도 자신이 친히 왕위에 앉을 것을(마 19:28)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노래한 것도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시 68:24) 다니엘 또한 “인자”께서 당신의 하늘 심판자리로 옮겨가시는 동일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단 7:9~11).
사도 요한도 당신의 희생과 승리의 보혈을 하나님께 제시하면서 이 보좌에 앉아 계신 사자이며 동시에 어린 양이신 분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계 5:6,7). 그는 또한 하늘의 지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늘 성전의 성소에서 일곱 금촛대를 돌보시는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목격하였으며(계 1:12~18) 나중에는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계 4:5)을 보았습니다. 그는 “금단”을 보았으며, “금향로와 많은 향”(계 8:3)을 가진 하늘의 봉사를 목격하였으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려서 그곳에서 거룩한 십계명이 보관되어 있는 “언약궤”를 보았다고 진술하였습니다(계 11:19 참조). 지금도 이 놀라운 하늘 성소의 봉사를 이해한 그리스도인은 지성소에 있는 전능한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와 필요할 때마다 온갖 은혜와 자비와 도움을 얻으라는 초청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히 4:14~16). 이 얼마나 놀랍고 크신 사랑과 은혜입니까? 놀라우신 구속의 경륜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 드리는 거룩한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D. 나의 몸값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표현하는 속전의 의미
성소의 기구들에 대한 교훈가운데는 20세 이상 되는 모든 남자들에 대하여 반 세겔의 세금을 징수하라(출 30:11~16, 38:25~31)는 주님의 구체적인 명령이 있습니다. 20세는 청년이 성인이 되는 나이로, 제사장직과 레위의 봉사와 군 복무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나이로 인정되는 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관례였습니다.(대상 23:24,27; 대하 25:5,31; 스 3:8)
처음 태어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이 같은 성직의무에서 벗어나는 대가로 값을 지불하였으며 만일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회에 참여하고자 할 것 같으면 그도 역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속전”을 지불해야 하였습니다. 나이나 신분이나 부나 인종으로 인한 그 어떤 예외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은 한 개는 단순히 “반”을 의미하는 베카(BEQ’A)로 불리워졌습니다. 이 명령은 세 번씩이나 “매 인”이 그 자신의 속전을 개인적으로 준비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백성들을 무리로 계산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개인 단위로 계산하고 계심을 알려 주는 중요한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또 한 예로 유월절 떡은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출 12:4) 준비되었으며 주님께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는 필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요 6:54 참조) 이 인두세의 또 다른 목적은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 30:12)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의 큰 전쟁의 결과로 이 지구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각 사람의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친히 회개한 자에게는 이 진노가 철회될 것임을 보장하는 “속전”을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선물로 주어진 베카를 위한 은(Silver)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은을 만들거나 벌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채굴하거나 주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함을 받았던 그 잊을 수 없는 밤에 선물로 그들의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자애로우신 하늘 아버지에 대한 비슷한 한 가지 예로 아기 예수님을 위하여 선물로 바친 동박박사들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요셉이 애굽에서 유랑하는 동안 그의 가족들을 부양할 충분한 재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각 이스라엘 백성의 영혼을 위한 보상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의 선물에서처럼 여호와의 계획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들은 그분의 은혜를 감사히 받고 그것을 성실하게 사용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장자가 반 세겔의 속전을 지불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가운데 계수되었습니다. 그의 자유에 대한 증거였던 이 은은 나중에 다른 반 세겔들과 함께 녹여져서 성막의 기초를 이루는 데에 사용됩니다. 속전을 낼 때마다 이스라엘백성은 자신이 한 때는 적국의 노예였으며 그의 구주께서 “애굽을 너의 속량물”(사 43:3)로 받아 주었음을 명심해야 하였습니다. 이 세상 끝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 대하여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호 13:14)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속전을 지불함이 없이는 불순종 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은 대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사건과 베카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사건의 치명적인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습니까! 성경은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대상21:1)하였음을 알려 줍니다. 다윗이 이 사단의 주장에 굴복하였을 때, 그는 요압에게 명령하여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요압조차도 이 일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사실(대상21:3)을 알고 있었는데 왜, 그 믿음의 사람 다윗은 이런 죄를 범하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인근 민족들 중에 그의 정복사업을 확대할 목적으로 군대를 증강시키기를 원했고 이 일을 위해서는 인구조사가 필요하였습니다. 다윗의 치세 하에서 이스라엘이 번영한 것은 왕의 능력이나 군사력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마음에 일어나는 교만과 이기심에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왕과 이스라엘백성이 신뢰하는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의 군대라는 인상을 인근 민족들에게 퍼지게 할 위험이 있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윗의 더 큰 죄는 각 사람에 대한 속전(출 30:14)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았을까요!
모리아 산에서 준비된 속전(구속)
솔로몬의 성전 터가 되고, 다윗의 인구조사의 죄로 온역이 내렸을 때에 단을 쌓았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거의 800년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모리아 산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는 죽을 운명의 이삭(장자)을 위하여 속전(구속)을 준비해 주신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깨달은 사도 바울도 구속은 예배의 기초라는 원칙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베카에 대한 규정
베카에 대한 고대의 규정은 부자라고 더 내거나 가난한 자라고 덜 내거나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의 구속에 대한 대가를 조작하는 인간의 노력은 결코 심판자에게 받아 들여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은 조각은 “성소의 세겔”(출 38:25)에 따라 부과되었으며 각 베카는 이것과 비교되었으며 “성소의 저울”에 달려졌습니다. 너무 큰 것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반면에 부족한 것도 거부되었습니다. 어떤 대치물로도 타협할 수 없으며 기도나 눈물이나 행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표준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속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 적절한 예증이라 하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이 원칙은 모든 세대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에 적용되었으며 구원을 위한 단 하나의 법이기도 합니다. 베카는 비교적 값어치가 없는, 작은 한 조각의 은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구원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벧전 1:18,19)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속전은 코페르라 불리워졌는데 이 코페르는 대 속죄일에 사용된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노아가 방주 덮는 덮개를 묘사할 때 쓰였던 “역청을 칠 하는 것”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제하”거나 “속”하는 것으로도 번역되며,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혈로 말미암아 제공되는 덮개를 가리키는 단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사 6:7,22:14,27:9). 그분의 죽으심은 회개한 죄의 기록을 말소하거나 제하거나 “가리”웠으며(출 30:15; 레 4:20,16:18,33; 요일 1:9) 인간의 빚을 갚아 줌으로 그의 “차용증서”나 “빚 문서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골 2:13,14) 이와 같이 베카는 우리에게 구속에 대한 이해를 더해 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념물로도 불리워졌던 베카
출 30:16에서 베카는 기념으로 불리워졌는데, 이 단어는 “기억하라”라는 단어의 어근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기억하다”라는 말은 항상 회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상을 띠고 있습니다. 예로 십자가상에서의 강도는 구주께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에 그는 이 단어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요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카가 모여졌을때 그 은은 녹여서 성막을 둘러싼 50개의 널판을 받치는 받침대 또는 기초를 형성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 은은 뜰을 둘러싼 기둥들을 장식한 뚜껑이나 기둥머리 뿐 아니라 휘장을 거는 아홉 개의 기둥들의 받침대에도 사용되었습니다.(출 38:28)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이 빛나는 은으로 이루어진 이 구역들을 바라볼 때 그는 자신의 해방은 값으로 산 것이며 그의 헌신은 “영혼의 속죄”(출 30:12,15,16, 속전과 속죄는 동일한 히브리어의 번역)를 가져온 “속전”에 의해서 보증되었음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속전으로 만들어진 이 받침대들은 그 기둥들이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도록 받혀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통찰력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속의 대가, 곧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가 온 성막과 그것을 위하여 세워진 모든 것의 기초가 됨을 상기시켰습니다. 성소에 사용된 모든 은과 마찬가지로 베카의 은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이중 속전을 지불하신 예수님
그리스도는 성전에 온전한 세겔, 곧 두 베카를 바친 것으로 기록에 남은 유일한 분이십니다.(마 17:24~27) 사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속전을 매수하거나 바칠 수 없습니다.(시 49:7 참조) 그러나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당신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 하셔서 “장자”(히 12:23)가 되심으로 그리스도는 “두 몫”(신 21:15~17)을 받을 권리를 얻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며 그분의 순종은 우리를 위하여 받아들여진바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원부터 사랑이신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으며 이 엄청난 사실들이 모든 성소 예배의 기초(은 받침)를 이루게 됩니다. 성소의 벽이 세워지고 영원한 예배가 시작될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은 받침대가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을 유지하기 위하여 바로 이 땅의 흙먼지 위에 세워져야 하였습니다. 그분의 완전한 순종의 확실한 기초를 의미하는 이 베카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고 경외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가르침을 알려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이 거룩한 성소를 살펴볼 때에 두렵고 떨리는 감격의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 뜰에 중요한 세 장소를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중앙에는 희생물을 태우는 항상 불이 붙어있는 장작이 있는 희생제단이 서있으며 이 제단과 성막 사이 약간의 남쪽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채워져 있는 물두멍이 서있습니다. 반대편 북쪽에는 짐승을 죽이는 장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세장소가 제공하는 불과 물과 피로써 주님은 죄책감과 죄의 더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양을 끌고 그의 천막을 나와 진영의 중심부에 있는 조용한 광장을 지나 성소뜰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하는 그 엄숙한 장면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그는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제물을 가지고 조용히, 떨리는 손으로 문휘장을 걷고 거룩한 성소뜰에 들어가 제사장을 만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에게 앞으로 그가 행하여할 의식과 그 의식에 사용되어질 기구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어 그가 스스로 준비되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성소 뜰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로 준비해 놓으신 교훈들을 엄숙한 마음으로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A. 나의 모든 길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상징하는 세 휘장문들
예배드리기 위하여 성소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제사장이거나 회개자이거나 모두 휘장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각 휘장들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지고 그 의미는 같을지라도 제일 바깥 쪽의 휘장은 좀 더 넓고 낮으며, 안쪽의 두 휘장은 좀 더 좁고 높게 만들어졌습니다. 이 사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제공된 성소뜰로 들어가는 입구는 가장 넓고, 성소에 있는 성화를 향하여 그리고 다음에는 지성소 안에 있는 영화를 향하여 갈때에, 즉 믿음의 길이 보좌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좁아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휘장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어근은 울타리 혹은 칸막이 커튼을 의미하며 격리와 보호를 암시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휘장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오라는 초청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은 첫째칸에서 봉사한 제사장을 격려하여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도록 속죄소 위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의 빛을 가려주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빛을 휘장의 씨줄과 날줄의 틈사이로 하나님의 종들이 분간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휘장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둘러싸고, 격리시키며 또한 들어가는 문을 제공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으로 우리들이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의 표상으로 주신 휘장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품성을 우주에 나타내시기 위하여 휘장으로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히 10:20 참조)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그의 위대하심과 위엄이 감추어진 것은 그분께서 슬픔과 시험에 싸인 인간에게 가까이 나아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는 영광은 자아희생적 사랑의 영광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 드러난 영광은 휘장이 열리면 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을 당신의 빛나는 임재로 이끌 것입니다.(요 12:32 참조) 이와 같이 자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가리워 주신 것은 그분께서 사람들 사이를 다시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그분의 인성과 접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옛날 모세가 쉐키나를 보여달라고 기도하였을 때(출 33:12~18 참조)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불같은 임재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를 “반석틈에” 숨도록 하셨습니다.(출 33:19~23,34:5~8)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손으로 그 입구를 덮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 손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그리스도의 못박히신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품성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한 “만세 반석” 안에 숨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과 선지자들은 이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의 영광을 보고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면 우리들은 십자가의 이편에서 그것을 뒤돌아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창조주께서는 이 지구를 가장 풍성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칠해 주셨습니다. 신비스런 빛깔과 색상, 변화무쌍한 대조 및 혼색의 조화를 이룬 땅과 바다와 하늘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조금 볼 수 있습니다. 변함없이 우뚝 솟아있는 산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소리없이 전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금과 은 기구들과 순백과 무지개 색깔로 된 무늬놓은 두꺼운 천들로 당신의 성소를 꾸미시는 주님의 목적은 우리의 눈과 감각을 즐겁게 하기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성소에 사용되어진 기구들과 휘장들의 색으로도 당신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고 하늘의 주제들에 대하여 다양하게 설명해 주시어 우리의 이해를 돕고 더 나아가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움-황금촛대에서 비치는 빛을 반사하는 순금으로 입혀진 벽들과 찬란한 천사들을 훌륭하게 수놓은 빛나는 휘장의 찬란한 색상, 금빛으로 빛나는 떡상과 향단, 지성소 휘장 너머의 거룩한 법궤와 신비한 그룹들, 그 위의 쉐키나 곧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가시적 현현-을 통하여 인류의 구속을 위한 사업의 중심이 되는 하늘성전의 영광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구속의 계획을 살피고 배워 거룩한 사람으로 살기를 얼마나 바라고 계시는지요. 우리들은 “성소”를 통해서 달리는 알수 없는 신성의 여러 측면들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롬 1:19,20 참조)
성소에 사용된 색상의 의미
성소에 사용된 색깔인 빨강(심홍, 주홍색), 노랑(황금색), 청색은 여러번 언급되어 집니다. 이 원색소들은 여러가지 비율의 혼합으로서 눈이 식별할 수 있는 모든 색채와 색조가 생성 될 수 있습니다. 이 색상들은 성막의 모든 부분의 상징적 봉사를 높여주며 우리가 이 색들이 보여주는 바를 깨달을 때 우리의 통찰력은 깊어지고 넓어질 것입니다.
흰색 빛의 본질인 흰색은 모든 색깔의 연합으로 이루어 집니다. 성경에서 흰색은 덕과 의, 순결, 고결함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흰색은 인간적 노력이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순결로 빛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완전한 성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세 제자에게 축소된 그분의 영광의 왕국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구주께서는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되어 희어졌”다(마 17:2)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감은 여기서 흰옷을 빛과 연결시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옷은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슥 3:3~5; 사 64:6 참조) 예수님께서는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의 착한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주홍”같은 죄를 정결케하여 그들의 품성을 “양털같이”(사 1:18) 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또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에 은혜로 “정결케” 된 자들은 “희게 될”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아들의 혼인잔치에 온 손님들이며, 신부를 위하여 아버지가 제공한 흰옷을 입은 승리자들을 나타냈습니다.(마 22:11~14; 계 3:5,18; 4:4; 6:11; 7:9,13; 15:6) 이 옷의 근원은 예수님 자신의 품성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계 19:8,14) “표백하는 자의 잿물”(말 3:2)로서의 그리스도의 봉사는 극심한 시련의 연단을 말해주는 한편 “어린양의 피”는 죄악적인 기질을 씻는 귀한 보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의 죄악들을 씻기 위하여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밝은 광선을 받아들임으로써 희게 되어질 것입니다.
청색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하늘색의 기초위에 놓여있음을 묘사하셨습니다.(출 24:10) 이 상징적인 색깔은 하나님의 보좌가 남보석이라는(겔 1:26) 에스겔의 글과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쓰신 판이 남보석 판이라는 히브리인들의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율법은 하늘왕국의 기초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백성들의 손목에 둘려있던 푸른 색과 그들의 발가를 두르고 있던 푸른색은 그들의 손이 하는 일과 그들의 발검음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색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우리들도 하늘나라로 향해가는 우리의 손과 벌걸음을 그분의 뜻안에 조율시켜야 하겠습니다.
홍색 주님께서는 홍색, 주홍 혹은 붉은색을 피의 색으로 죽음을 초래하는 죄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피는 바로 용서과정의 기초이며 희생 제물에 의하여 예시된 정결의 기초입니다. 이 색깔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만이 칭의와 받으심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합니다.
자색 자색은 붉은색과 푸른색을 여러가지 비율로 혼합시킴으로 만들어지며 자색옷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왕들의 옷의 색이었습니다. 자색은 우리의 충성된 대제사장에 대해서 말해주는데, 그분께서는 당신의 봉사에서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삼으신 그 순종의 청색과 희생을 통하여 흘려진 그분의 인성의 피의 심홍색과 연합으로(자색) 우리의 구속을 위해 하늘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십니다.
노란색(황금) 노란색은 성소에서 참으로 넓게 사용된 황금의 색깔입니다. 이 황금빛은 힘있게 떠오르는 태양광선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지상의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애를 밝혀주는 의의 태양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황금은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세상의 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왔지만 하늘에서의 가치는 이와는 반대로 그 금 자체가 아니라 금이 상징하는 믿음에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시대의 교회인 라오디게아인들에게 그처럼 절실하게 필요했던 금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순결케하는 정금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인께서는 이것을 “돈없이 값없이” 팔고자 열망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높고, 깊은 의미를 담고있는 색상들인지요!
녹색 순종을 상징하는 청색과 사랑을 상징하는 황금색이 배합되어 생기는 녹색은 하나님께서 창조시 지상을 옷입힌 색깔입니다. 곡식의 선녹색 싹이 겨울잠 후에 태양을 향하여 터져나올때 농부의 희망이 살아나는 것처럼 녹색은 성장과 희망, 불멸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검은색 성막에서 검은색을 사용한 유일의 경우는 지붕의 제일 바깥 덮개인 해달의 가죽에서 입니다. 검은색은 죄에 대한 심한 비통은 물론 빛의 부재, 영원한 영광에서 분리된 흑암을 시사합니다. 부정한 동물에서 취한 이 가죽들은 성막이 대표한 분의 지상 생애의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를 가리킵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 못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타락하고 죄된 육신을 쓰시고 사람의 생애를 사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 바로 이것이 경건의 비밀이 아닙니까!
이 시대에 휘장이 갖고 있는 의미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신 순간에 성전의 둘째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이제 우리에게는 휘장이 걸려있지 않은 “새롭고 산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휘장이 찢어져 열린,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참조)
곧, 결국에 하늘성소의 대속죄일이 절정에 이르게 되면 마지막 심홍색의 기록들은 깨끗하게 다 지워질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육체에 있는 상처의 흔적들만이 영원히 남아 “그 권능의 비결”(합 3:4 참조), 광명과 흑암 사이의 대쟁투에서의 승리의 증거를 온 우주에 선포하실 것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Amen.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
B. 번제단
우리의 모든 고난조차도 주님의 것임을 뜻하는 의미로 지금도 우리의 마음 안에서 번제의 불이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 놋제단은 성소 뜰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며 예배하기 위해 들어 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이 제단의 실제 규모는 너비와 길이가 각각 5규빗, 높이가 3규빗이었습니다(출27:1).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가로 세로 9피트, 높이가 5피트 6인치가 됩니다(성전 규빗의 길이는 1.8피트). 이 높이는 제사장들이 제물을 손질하기에는 어려운 높이이기에 제단 사방으로 다닐 수 있는 하나의 단을 만들었습니다(출27:5,38:4). 이것을 제사장들이 밟고 제단 주위를 걸어 다녔기에 그 길을 “둘레 길”이라고 불렀다고 유대 역사에 나와 있습니다. 이 둘레길은 흙으로 만들었고 사람의 벌거숭이가 노출되지 않도록 금지되었으므로 계단이 아닌 경사로에 의해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 네 귀퉁이에는 고리가 붙어 있어 고리에 놋을 입힌 막대기를 끼워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제단을 옮길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희생 제물에서 나온 피 때문에 미끄러울 때는 그 경사로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광야 생활의 실제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매일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6:6에서 이런 의식들을 생각하며 노래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번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나무와 놋
다윗은 의인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했고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나무”이십니다(계2:7, 22:2). 나무는 썩기 쉬운 물질을 시사하며 상징적으로 시간의 황폐 행위에 상처를 입기 쉬운 인간의 연약성을 나타냅니다. 모세는 보잘것 없는 “떨기나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나타냈으며(출:2-4) 이 키 작은 아카시아 관목은 내주하는 쉐키나를 통하여 빛나게 되었고 불타는 신성의 임재를 견뎌냈습니다. 이와같이 성소에 있는 모든 나무는 타락한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나무들은 불멸의 금속인 동, 은, 금을 입힘으로써 손상을 당하지 않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번제단은 브사렐이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들 때 구리로 쌌습니다. 그리고 약 20년 후에 고라의 반역에 가담했던 250명의 족장들이 사용했던 향로들로 덧 씌워졌습니다. 이 사실은 한때 반역의 상징이었던 놋 향료들을 통해 반역이 영원한 희생 제단의 봉사를 보강시켰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놋 혹 구리는 불패와 내구의 상징으로 성경 여러 곳에 상징되어져 있습니다(슥6:1,미4:13,욥40:15-24). 특별히 놋 뱀은 악마적인 사단의 세력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장차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실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나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구리에는 차츰 푸른색의 이끼가 끼이게 됩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에 바쳐진 희생제물로 인해, 절망적인 죄의 긴 겨울 다음에는 녹색이 상징하는 희망의 봄이 죄인의 마음에 솟아 날 것을 알려 주는 귀한 상징이 아닐까요! 이처럼 제단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영원한 속죄의 제단에서 나오는 불과 피의 준비가 없으면 성소의 모든 봉사는 우리를 구속하는 일에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단의 뿔
뿔은 성경에서 힘과 권세의 표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 중에 죽임을 당하고 살아 나신 일곱뿔을 가지신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이 일곱 뿔은 완전한 능력을 증거합니다. 뿔은 기름을 넣어 두는 그릇으로 사용되었으며(삼상16:1,13; 왕상1:39) 성령의 상징으로서 이 붓는 기름(관유)은 선지자, 제사장, 왕을 위임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능력의 근원으로서 하늘을 그들에게 가리키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도 이 모든 세 직임에 대하여 기름 부음을 받았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뿔은 회중들을 소집하거나 알리는 일에 쓰이는 악기로도 만들어졌습니다(민10:1-10; 렘4:5; 겔33:3-6; 욜2:1). 그것들은 여리고 전쟁에서, 또 기드온에 의해서 사용되어졌으며 월삭이나 희년에 백성들을 부르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특별한 기별을 전하기 위해서는 뿔로 만든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하였습니다(고전14:8). 또 뿔은 어떤 동물들에게 있어서는 공격과 방어의 무기입니다. 이와 같은 뿔에 대한 모든 사상은 제단 뿔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뿔은 그 힘을 나타냈고 기름과 아울러 피로써, 하나님의 어린양과 성령의 봉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옛날 제단의 뿔의 또 하나의 역할은 속절없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로 사용된 것입니다. 복수를 피해 가는 도망자들은 뿔을 붙듬으로써 자기 자신을 여호와의 보호 아래 놓고자 노력했습니다(암3:14; 렘17:1; 왕상1:50-55).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자와 범죄한 자에게는 이 피난처가 무효였음 또한 기억하여야 합니다(출21:13,14).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임을 당한 요압(왕상2:28-34)과 솔로몬을 반역한 아도니야(왕상1:50-53,2:23,24)의 무서운 일이 성경에 나와 있음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성소 뜰 의식들의 중심인 제단 봉사
성소 봉사는 제단, 특히 불과 피에 직접적으로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불로 붙여진 제단의 불과의 접촉이 없이는 어떤 속죄의 제물이 바쳐지거나 감사 제물이 드려질 수 없었습니다. 또 어떤 진설병이 굽어지거나 등불이 켜지지도 않았고 향도 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연중 절기와 금식은 물론이며 전체적으로 행해진 매일의 의식들도 이 하늘의 불이 없이는 행해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성막 뜰 한 복판에 모든 예배의 기초로 서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피와 가납해 주시는 하늘의 불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지정된 만남의 장소인 자아 희생의 제단에서 우리의 마음을 밝히 살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필요를 드러내 주는 이 하늘의 불이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성경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하늘의 불은 열납하시고 정결케하는 하나님의 품성을 상징합니다(신4:24,9:3; 히12:29; 사6:6,7). 풀무의 불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불은 우리를 정결케 하며 거룩하게 해 줄 것입니다(단3장,벧전1:7).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때에 그의 마음의 제단에서 하늘의 불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이 타 오를것입니다. 이 불로 우리 마음에 쌓여 있는 더러운 이기심의 쓰레기들을 치우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불이 우리의 마음을 태우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그 분의 무아의 사랑은 거룩한 말과 사상과 행동이 되어 우리를 태우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은 우리의 이웃과 세계로 흘러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특권이 아닙니까! 이 특권은 우리에게 일상 생활에서의 완전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 옛날 번제단에서 제물이 완전히 태워져야했던 것처럼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우리의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제단에서 나온 재의 의미
이 잿 더미는 대리 희생 제물이 완전하게 태워졌다는 것을 경배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한동안 제단과, 뜰로 들어가는 입구 휘장 사이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 재들을 서둘러 치워 버리지 않은 이유는 그 재들이 의미하는 경고와 격려가 그들의 사상에 깊이 새겨 지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재들은 또한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운명을 가리켰습니다. 시편73:17에서 아삽은 성소에서 이 잿더미를 보고 그것이 “저희 결국”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음을 알려줍니다. 제단에서 재를 옮기고 나면 제사장은 그의 특별한 옷을 벗고 그의 정규적인 옷을 입었습니다(레6:10,11). 그리고 적당한 시간이 지나간 후에 그것을 그릇에 담아 개인의 속죄 제물을 태우는 “영문 밖 정결한 장소”로 가져 갔습니다. 이 장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히브리 백성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하여 줍니다(히13:11,12). 사실 “성벽 바깥”의 이 장소는 사실상 제단의 연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서 특별한 속죄 제물의 시체들이 태워졌기 때문입니다(레16:27,6:30). 이 재처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지셨고 한동안 그 분의 죽임 당한 장소 가까이에 있는 굴 속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이 재의 의미를 이해한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의 의미를 더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불 외에 다른 그 어떤 불도 사용되어서는 안 됨
여호와께서는 하늘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제단에 결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출30:9). 우리에게는 술에 취해 다른 불로 불을 붙인 향로를 들고 들어간 나답과 아비후의 슬픈 역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의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아벨의 제물은 받아 주었고 가인의 피 없는 제물은 거절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거룩한 불이 아닌 세속적인 불, 즉 자신의 생각, 계획, 감정, 비뚤어진 품성에서 나오는 불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서 비취는 빛은 결코 그들 스스로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세상의 빛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이 거룩한 불 외에 다른 불을 사용하지 않도록 우리를 경고하십니다. 다른 그 어떤 불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며 결국은 멸망으로 내몰것입니다.
갈보리 제단의 십자가의 의미
그 옛날 한 회개자가 그의 제물을 바치고 죄를 고백하고 그의 제물을 죽이는 제단에서의 봉사는 그 회개자에게서 그의 죄를 분리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은 그를 하늘이 받아주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제단 위에 그를 대신하여 놓여 있는 제물을 사르었습니다. 그는 이제 무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의식들은 모두 장차 세상 죄를 위하여 갈보리에서 돌아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가리키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희생의 갈보리 제단의 십자가가 그의 생애와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고 필요한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희생을 기억하고 명상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참 가치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의 희생은 그분의 제사장 중보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더해 줄것입니다. 하늘 성소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현재의 우리의 위치에 대하여서도 깊은 깨달음을 더해 줄것입니다.
C. 물두멍
물두멍은 성소 뜰, 곧 번제단과 성소로 가는 휘장 사이에 위치한 커다란 놋 대야를 말합니다. 이 물두멍은 우리의 모든 더러움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물두멍을 가리키는 이름의 근원은 파다, 구멍을 뚫다, 때리다 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의미는 시편 기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묘사하였던 시편 22:16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처럼 갈보리에서 들려진 망치와 못은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물두멍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정결한 구원의 물은 지금도 온 세상을 흐르며 “다 내게로 오라”는 간절한 외침을 내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제단이나 거룩한 장소에서 봉사하고자 하는 모든 제사장은 물두멍에서 물의식을 통하여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출 30:17~21). 주님께서도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고전 6:11)이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로써 이루어지는 이 영적 정결 의식은 물두멍이 성막 뜰에서 표상적으로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물두멍은 이스라엘의 여자 예배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바친 잘 닦여진 구리나 놋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성경에서 거울은 율법의 한 기능, 곧 죄를 드러내 주는 것을 예시합니다(약 1:23~25; 고후 3:17, 18). 나사렛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에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과, 우리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태 두 가지를 다같이 비춰 볼 수 있는 하늘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의 이기심을 나타내던 거울은 이제 그들의 생활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물두멍을 만드는 데에 바쳐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놋거울이 물두멍과 그 받침으로 만들어진 후 그 분께서는 그것들을 침을 당한 반석에서 나온 물로 채우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침을 당한 반석에서 나온 깨끗한 물
주님께서는 물두멍의 풍부한 역할을 위한 물을 깨어진 바위에서 마련하셨습니다(출 17:5, 6). 간음의 의심을 받는 여자와 관련된 의식에서는 물두멍에서 떠온 “거룩한 물”만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물두멍에서 떠온 물이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하며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것이라고 결론짓게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의식을 위하여 물두멍의 물은 실로의 못에서 길어 왔습니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된 이 샘은 평화의 왕이신 임마누엘의 상징이었습니다(창 49:10). 실로암은 이 못에 해당되는 다른 이름이며 그 뜻은 “하나님이 보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요 9:7). 물두멍에 잠기고 목욕하기를 택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결함을 주십니다.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장차 용서와 정결을 갈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새 생기를 주는 평화의 못이 되실 그분을 가리키는 의식으로 행해졌습니다.
새 언약의 물두멍 봉사
바울은 구약의 물두멍의 의미에 대한 두 가지의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한 것은 주님의 은혜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이 구원의 봉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3~5)으로 효력을 나타냈다고 상기시켰습니다. 바울이 쓴 “씻음”이라는 말은 물두멍의 샘과 철저하게 목욕하는 수단을 나타내기 위해 헬라어 구약에 사용된 말에서 온 어근에서 유래합니다. 사도에게 있어서 물두멍으로 대표된 사상은 씻음의 행동과 동시에 물을 포함합니다. 그는 디도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로 불리워진 죄인들의 중생은 매 경우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주어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기능은 물두멍의 씻음을 통하여 성소에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이 물두멍에 대한 다시 한번의 언급에서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엡 5:26) 하신다고 에베소인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물두멍의 씻음이 영감의 성경을 순종함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를 예시했다고 하는 깊은 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는 독자가 영감에 의하여 성경에 제시된 사상을 그의 마음속에 언제나 머물도록 허용할 때 우리의 생각하는 사고의 과정은 깨끗하게 씻겨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두 가지 통찰을 조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능력은 물론이요, 그 분의 중생케 하고 의롭게 하는 봉사는 그리스도인이 계속적으로 영감의 성경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개인적으로 적용할 때 그의 마음에서 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봉사는 물두멍의 물을 통하여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시되어 있었습니다.
물두멍은 피와 물로써 성별되었음
성막이 처음 세워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물두멍과 그 받침이 사용되기 전에 봉헌의 의식을 먼저 명하셨습니다. 이 봉헌 의식에서 피와 기름이 잇따라서 물두멍과 그 받침위에 뿌려졌습니다(출 30:26~29; 40:11; 레 8:10,11). 이 두 가지는 그들에게 물두멍이 가리키는 봉사에 나타난 갈보리의 희생 제물의 피와 오순절의 성령의 기름이 담당한 역할을 바라보도록 표상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 이중의 수단은 이스라엘의 물두멍 씻음에 활력을 부여하고 정결케 하는 능력을 표상하였습니다. 이 의식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물두멍을 구별하고 계심을 강조하셨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침례를 표상하는 물두멍
구약의 물두멍으로 표상된 봉사는 신약의 침례를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예식을 받아들이기 전에 제자는 회개하고(행 2:38), “옛 사람”이나 “그의 이전 생활 습관”을 버리기로 은혜에 의하여 결심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또한 율법의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하신 일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그의 마음에 깊은 감사를 일으킬 것이며 날마다 마음이 엄숙해짐으로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요, 주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욕과 야망을 자원하여 묻어버리겠다는 표로써 침례의 물속으로 들어가도록 자기 자신을 허락합니다(롬 6:1~8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의 새로 태어난 자녀의 영적 부활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를 물두멍에서 일으키십니다. 일으킴을 받은 그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지라도 이 거듭난 제자는 이후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갈 2:20)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길을 날마다 걸어가는 동안 그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만일 우리가 동의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주님 당신의 것으로 간주하시고 우리의 사상과 목적을 당신의 뜻과 일치하도록 섞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실행에 옮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를 통하여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그들의 시련에서 구원하신 여러 가지 방법들-그 중 많은 것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것들과 유사-은 물 침례와 관련된 성경 말씀들로 예시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침례의 의미가 방주 안에 남은 믿는 자들이 안전하게 보호되었던 대홍수에 의하여 묘사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벧전 3:18~22). 바울은 홍해의 큰 물결이 “침례 받은” 이스라엘의 피난을 위한 보호벽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고전 10:1,2).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하나님의 구름 그늘이 당신께 굴복한 유순한 백성들을 뜨거운 광야를 편안하게 통과하도록 한 것 역시 그들의 침례에 해당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깊은 바다에 빠진 반항하는 요나를 지켜준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완전히 자신을 맡겨 버린 것을 설명한 그 분의 “피의 침례”에 대한 예증이 되었습니다. 영감은 이 각각의 네 이야기들을 승리의 부활 전에 있는 침례의 매장과 관련시켜 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 진리들을 성령의 역사로 중생케 하는 물에 비유함으로써 니고데모에게 공개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이 물두멍과 그 물로 이루어진 성소 봉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랫동안 시사되어 왔음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물두멍의 정결 봉사는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함
율법은 모든 봉사자에게 성소에서 어떤 의무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깨끗이 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씻어 모든 불결을 제거해야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이 주님께 봉사하고자 시도하기 전에 자신들의 생애를 정결케 해주는 은혜의 물줄기를 규칙적으로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물두멍에 대한 충성된 제사장인 그리스도인의 관계와 그 세밀한 요구들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그들의 이웃에게 감동을 주어 이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 옛날 성막뜰에서 반복된 물두멍의 기별은 여전히 우리에게 끊임없는 정결을 유지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매일의 생애의 정결이 없으면 칭의가 그리스도인 발전의 다음 단계인 성화, 곧 성소 기구들의 상징과 그것들을 통하여 실천된 의식들에 의하여 가르친 성화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정결을 찾고자 애쓰던 다윗의 결심이 이 시대의 우리의 결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시 26:6, 73:13). 예전의 물두멍의 봉사는 오직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으로 태어난 자들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출생을 통하여 그분의 봉사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매일 복음의 여러 분야를 대표하는 “주님의 기구들을 메”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중생의 물두멍”으로 표상된 실체와 그것이 초래한 정결이 우리의 매일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사장의 성별과 물두멍의 물
물두멍의 물은 대제사장의 성별과 관련된 의식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대표자로서 모세는 아론의 완전한 정결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를 물두멍에서 길어온 물속에 잠기도록 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의 경험에 있는 이 단계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도 받을 수 있느냐”(마 20:22; 눅 12:50)라고 질문하셨음을 기억하십시요. 아론을 침례 주는 일에 나타난 모세의 이 행동은 그리스도의 지도 아래 있는 모든 목자들의 순례길에 하나의 이정표로 표상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침례 매장이 완전한 위탁을 나타낸 것임을 명심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롬 6:1~11). 이 처음의 씻음을 근거로 그 후에는 오직 손(매일의 활동)과 발(순례 여행의 발걸음)의 씻음이 필요할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족 예식에서 상징되어 나타났습니다(요 13:10).
그 외의 이루어진 물두멍의 예식들
희생 제물의 부위들이 제사장에 의하여 제단에 놓여지기 전에 이 물로 씻겨짐을 입었습니다(레 1:9, 13). 랍비들은 간음을 의심받는 여자를 판정해 주고자 할 때 물두멍에서 떠온 물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속죄일에 행하여진 물 의식들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대제사장은 다섯 번 자기 자신을 물에 담갔습니다. 그리고 낮 동안에 행해진 의식 동안에는 물두멍에서 떠온 물로 자주 손발을 씻었습니다. 이 예증들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이루는 모든 활동에 있어서 죄와 불결을 씻어주는 샘에 의하여 우리가 정결한 상태로 보존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 줍니다. 성막의 뜰에 분명하게 놓여진 물두멍의 끊임없는 존재는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합니다. 이처럼 매일의 발걸음에서 더렵혀진 우리들에게도 끊임없는 정결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를 씻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고 하신 주님의 경고는 우리를 특별한 힘으로 그분께 바쳐진 상태로 가까이 지내도록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애의 순결을 얻도록 그분께서 마련해 놓으신 준비는 얼마나 완전하고 적절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이 유익을 얻을 수 있었던 유일의 장소가 물두멍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죄와 부정을 씻기 위하여 다른 샘 근원을 찾는 자들은 더러워진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샘을 무시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영원한 손실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물두멍과 유리바다
성경에서 물두멍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곳은 구속 받은 자들이 우주에 보여지는 장면에서 입니다. 계시자는 그것을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계 4:6)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계시록의 장면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헌당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왕은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또한 여호와께 기도하기 위하여 특별한 “바다”혹은 강단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대하 6:13; 왕상 8:22). 이 히브리어 “바다”는 바로 이 물두멍에서 온 말이었습니다(대하 4:2). 이처럼 요한의 이상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마침내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모여 “바다”가에 서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침례 중생의 상징인 “바다”(물두멍)는 마침내 구속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 궁극적인 기초가 될 것입니다. 물두멍에 대한 이 마지막 이상은 그리스도의 변화된 제자들이 그 후로는 더 이상의 정결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을 우리에게 남겨줍니다. 그들은 영원하신 심판자의 보좌 앞에 흠없이 서 있고(계 14:5) 그들의 품성의 옷은 갈보리의 두 줄기 흐름으로 씻기어 희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이요 제사장들로서” 밤낮 그분의 성전에서 그 분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물두멍의 사명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지막 칭의와 성화를 통하여 완성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