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atians Chapter 1
Galatians Chapter 2
Galatians Chapter 3
Galatians Chapter 4
Galatians Chapter 1
갈라디아서 1장 1~5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서 1:1~5)
모든 복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기초하고 거기에서 그 권위가 유래합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셨으며(요 1:1; 17:5 참조)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골1:17)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는 대등한 관계에 계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아버지와 아들은 한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히1:3; 8:1; 계3:21참조). 두 분 사이에는 평화의 의논이 있었습니다(슥6:12,13 참조).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기는 하셨으나 그의 일생 동안 줄곧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로 그의 친자권이 온 만물에게 증명되었습니다(롬1:3,4참조).
갈라디아서 1장은 사도바울의 인사말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주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능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요3:34). 그러므로 바울은 권위를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서신이나 성경의 다른 말씀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권위를 인식해야 하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뿐만 아니라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벧전4:11)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서신은 바울의 사도직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권세를 가지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인사말은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를 이루시므로 여기에서도 바로 창조적인 말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렇게 말씀으로 모든 창조 사업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시33:9). 그러므로 여기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인사말을 그저 시작하는 인사말로 읽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의 모든 축복들을 가져다 주는 창조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3:15).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을 보내셔서 모든 사람에게 의와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드리신 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로부터 그가 사신 것인 우리의 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 “이 악한 세대”는 바로 우리 자신의 죄 있는 자아,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세상을 악하게 만든 것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상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악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세상을 도피하여 수도원에 갔었지만 그 곳에서 그의 죄가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한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 무겁고 짓누르는 짐을 우리의 마음과 등에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에 “악이 함께 있는 것”(롬7:21)을 발견합니다. “이 악한 세대가 항상” 함께 있으므로 탄식하고 절망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소리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가장 큰 시험을 만나셨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은둔 생활이나 수도 생활이 하나님의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부패를 막는 소금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향기가 세상이 부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사람들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소금은 썩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것과 잘 섞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확신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셨기 때문에 그 죄들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고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주장할 권리 또한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죄의 행위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있고 또 나타나는 죄들을 사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에 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우리 자신들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들을 그리스도께서 사셨다는 사실에 뒤따릅니다. 우리의 죄들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사시면 역시 우리 자신도 사시는 것입니다. 딛2:14, 고전6:19, 벧전1:18,19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상점에서 원하는 물건에 값을 치르고 샀다고 하십시다. 상인은 그 물건을 구입자에게 빨리 가져다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구입자는 자기 물건을 소유하기 위하여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가 복종하고 안 하는 일이 예수님께는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신의 피로 사신 영혼들을 무한하신 사랑으로 사모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므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1:4~6) 우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하나의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세가 아버지에게 있으시다는 것을 인정하므로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시100:3). 권세와 영광은 같은 것입니다. 엡1:19,20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권세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롬6:4절에서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고 알리는 “영원한 복음”을 마지막으로 선포하는 취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계14:6,7)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갈라디아서는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는 책이며 특별히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주신 기별입니다.
• 디도서 2:14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전서 6:19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베드로전서 1:18,19 –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갈라디아서 1장 6~10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라디아서 1:6~10).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에 일어난 문제의 위급함을 직감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멸망으로 치달아가는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책임감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의 뜨거운 설교를 열린 마음으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를 부르신 이는 누구십니까?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벧전 5:10)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9)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리라”(살전 5:23,24) 인류를 부르시는 이,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형제들이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있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왜, 무엇이 그들을 흔들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부르시기 위하여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도바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일에 부르심을 받은 많은 분들의 글들이 있습니다. 전하는 입은 많을지 모르지만 말씀하시는 음성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배도는 항상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하는 결과에서 올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경고하였습니다. (행20:30참조) 많은 사람들은 일단 교인이 되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생각해야 할 한 가지는 “나는 주님과 연합하여 그의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가?”하고 자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모든 믿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인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요 6:63 참조) 그러므로 생명 즉 구원을 주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그릇된 것이 복음으로 통용되려고 하면 반드시 생명의 길이라고 가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런 거짓 이론에 꾀임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능력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그들 자신의 능력인 그들의 생각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상은 참 복음이 아니라고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의 문제는 어느 것이 참 복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인지 또는 다른 사람들이 전한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갈라디아서는 참된 복음을 다른 거짓 복음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영감의 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이며 천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의 복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즉 복음은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가 전파하였던 같은 복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강한 경고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기에 그러합니다. 능력이 아닌 것을 신뢰하도록 하는 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 멸망의 길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렘 17:5)입니다. 사람들을 이끌어 저주를 받게 하는 사람은 그 자신도 저주를 받습니다.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27:18). 만일 육체적으로 소경 된 자를 길을 잃게 하는 자가 이렇게 된다면 한 영혼이 길을 잃어 영원한 멸망을 당하도록 하는 자는 얼마나 더 큰 저주를 받아야 되겠습니까? 거짓된 구원의 소망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들로 하여금 결코 구원할 수 없는 것을 신뢰하도록 하는 것보다 더 악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참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큰 임무인 것을 새삼 알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이 성경에 제시하지 않은 다른 그 무엇을 전한다면 그도 또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범죄한 천사들”(벧후2:4)과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6)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고후 11:14,15). 그들은 죽은 자들의 영(사실은 죽은 자의 영이 아님)이라고 말하면서 영계로부터 새로운 기별을 가져 왔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 속임을 받을 염려가 없습니다. 말씀은 길을 비추어 주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교회의 지도자들은 복음의 몇몇 엄격한 원칙들을 완화시키면 이교 신자들이 교회에 정착하기가 쉬워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회를 다스리게 될 정도로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상의 밑바탕에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 진리를 굽히고 양보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갈라디아 교회에도 행하여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종이었으며 하나님만이 그가 기쁘게 하려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는 사람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이 원칙은 모든 종류의 봉사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두는 자는 사람들에게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2~24). 이 원칙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하여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여 왔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사도바울의 이 외침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장 11~24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갈라디아서 1:11~24).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요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하나의 계시가 아니고“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어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바울에게 계시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전파하고 계시하십니다.“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하나님은 모든 사람 안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를 기다리시고 열망하십니다. 우리는 “불의로 진리를 막”으나“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이는 것 같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롬 1:18~20)인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요14:6 참조)이시며 하나님의 능력(고전 1:24 참조)이시며 하나님의 신성(요 1:1 참조)을 가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악인들이 막고 있는 진리이시며,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십니다(신 30:14; 롬 10:6~8 참조).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 수 있지만 우리가 막고 거스리기 때문에 그분을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나타나게 되시기를 인내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 길을 가고 영광을 받으며 나사렛 예수의 완전한 생애가 죽을 육신에 나타나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이 일은 지금 아무리 죄 많고 타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하는 자”안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렇게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막고 거스리는 것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의 자신에 관하여, 그의 과거 열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바를 구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약의 가르침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의 성령이 선지자들 속에 계셨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후에 사도들이 전하였던 꼭 같은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모세와 그의 글에 대하여는 조금도 정죄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에 대하여서는 그들이 성경에서 읽고 명하는 것은 모두 따라야 하지만 그들의 본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마 23:2,3)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에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유전, 조상의 전통을 믿고 따랐습니다.
성경에는 모태로부터 필생의 사업에 택정함을 받은 삼손, 예레미야, 이방의 왕 고레스, 그리고 침례 요한의 예가 나와 있습니다. 이런 예는 단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모두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살후 2:13)라는 말씀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딤전 2:4)는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모두에게“각각 사무”(막 13:34)를 맡기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소명하신 일을 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지금도 우리와 분투하고 계십니다. 사울은 지독한 핍박자였지만 큰 사도가 되었습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따라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택정함과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상을 깨닫고 결단할 때 그 생애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아는 지식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간구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이끌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에 충성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우리는 아주 귀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믿는 대신에 그저 목사나 다른 사람의 의견만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그는 올바른 선택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에게 그 큰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의논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혈육은 내 자신입니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지혜 있는 사람은 즉시 순종하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도 의논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 즉시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여”야 할 것이며“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선지자였습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이교와 이방이라는 말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또 이 단어는 열방이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사용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에서“너희가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는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이교도”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이 구절자체가 이방인은 곧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교도들 가운데서 취함을 받았으므로(수 24:2 참조) 모든 이스라엘은 이방인 가운데서 취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므로“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롬 11:25,26)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를 어느 한 민족에게 국한시켰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이 분이 온 인류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만약 우리로 말미암아 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욕하는 자들이 되는 것만큼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Galatians chapter 2
갈라디아서 2장 1~10절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복음이 무엇이며 갈라디아 형제들의 형편과 바울 개인의 생애에 대해서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인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개종한지 17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회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회의의 주제가 무엇이며 그 회의와 사도 바울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유일한 책임은 형제들 가운데 “복음의 진리”를 보존시키는 것입니다. 1장의 내용을 마음에 분명히 새긴 후에 2장 연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장은 1장의 연속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갈라디아서 2:1~10)
14년 후에라는 뜻은 사도 바울이 개종한 지 3년 후에 있었던 첫 번째 방문(갈1:18) 14년 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루살렘의 두 번째 방문은 그의 개종 17년 후 이며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총회의 때와 일치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다루고 있는 회의는 바로 이 총회이며 이 총회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에 대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이 연구를 위해서 사도행전 15장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갈라디아 1장 6, 7절에서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켜 거짓 복음을 전하고 그것이 마치 참 복음인 것처럼 하여 형제들을 괴롭히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새 가르침에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반대한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말한 대로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행 15:2) 있었을 정도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현재 우리들에게도 성경대로 이해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에 관한 것이고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기에 그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으로 흩어진 형제들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으로 세워진 안디옥교회의 형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의하면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의 일에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한 성령의 음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유대로부터 어떤 자들이 전한 거짓 복음으로 문제가 일어나자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보내게 됩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거짓 복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거짓 복음을 가르친 사람들을 “가만히 기어들어온 거짓 형제”라고(데마크역) 했습니다. 이들은 구원에 대한 이해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구원이 인간의 능력의 행사에서 온다는 결과를 퍼뜨리게 해서 새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할례가 실제로 무엇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로마서 2장 28절과 29절에는 표면적 육신의 할례와 이면적 유대인이 받게 되는 마음의 할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의 실패를 기억나게 하고 육신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할례의 표 곧 육을 절단하는 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성령을 통하여 육신의 죄의 몸을 벗어 버림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롬4:11). 이렇듯이 외적인 할례는 마음의 할례의 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사실에 기인하지 않는 할례는 하나의 거짓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밝히 알려 주고 계십니다. 이 거짓 형제들은 신자들에게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그들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그들 자신들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인간을 높이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들은 신자들이 외적인 할례의식을 신뢰하도록 하여 성령의 역사를 대신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오직 참 할례는 성령으로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 분명한 구원의 도를 신뢰하였던 신자들을 꾀어 육신을 의지하게 하려던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한 진리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인간의 노력은 그것이 아무리 진지하고 참되다 할지라도 불완전하며 죄 외에는 아무런 결과를 가져 오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64:6)과 같으며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14:23)라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이제는 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는지, 여기에는 어떠한 교훈이 담겨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바울은 “계시로 인하여” 올라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의 권장에 따랐기 때문이 아니고 같은 성령께서 바울을 감동시켜 그 지시에 따라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그의 본체의 형상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진리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사도 바울이 복음을 받은 것과 같이 그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나 통로로 사용하실 수는 있으나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그 진리를 주실 수 있으십니다. 어떤 사람의 명성이나 권위, 부유함은 진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 족속 중에 작”(미5:2)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며 거의 모든 생애를 평판이 좋지 않은 나사렛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는 항상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워지셨습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하나님께서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사57:15)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지위에 가치를 부여하시지 않으십니다. 권세를 주는 것은 지위가 아닙니다. 수많은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의 모든 왕들보다 더욱 높고 위대한 권세를 차지하였습니다. 권세는 영혼 안에 있는 확고한 하나님의 임재이시기에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보시고 그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고”(행15;12)하였을 뿐이며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골1:28)하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능력을 소유하는 것은 가장 겸손한 신자의 특권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빌2:13)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은 오늘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이 믿음이 있다면 오늘 우리의 고백과 사도 바울의 고백은 완전한 하나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도들 간에나 교회들 간에 조금도 의견의 차이가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에베소서 4장 13절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도록 하셨다는 말씀을 잘못 읽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오직 주도 하나인 것처럼 “믿음도 하나”(엡4:5)이며 곧 “예수의 믿음”(계14:12)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믿음은 믿음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물론 아는 지식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정도의 차이를 갖고 어떤 논란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빛이십니다. 촛불 외에 평생 다른 불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전등불을 보고서 그것이 불빛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고 알아가는 일에 성실하고 충성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일 뿐이기에 그러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17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1~17)
하나님은 마음을 순결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계시기에 그러합니다.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롬 3:22,23)는 것을 알고 계셨으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롬 3:24)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명확히 알고 그렇게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였고 예루살렘 총회에서도 충분한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러한 때에 행한 사도 베드로의 태도를 외식이라고 지체하지 않고 견책한 것은 결코 지나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맞습니다. 베드로의 그 태도는 분명한 외식이었습니다. 그 자체가 잘못되었을 뿐더러 제자들을 혼란케 하고 잘못 인도할 위험이 많았기에 사도 바울은 망설임 없이 진리를 보호해야 하였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의 능력에 대해 사람들은 확실한 이해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에 대해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의 실수를 하였으며 그것은 교리상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는 무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실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이었기에 바울이 그에게 한 견책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무류는 어떤 인간의 몫이 아니므로 사도 바울 자신도 그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연약한 자를 어떠한 모양으로라도 지배할 수 없습니다.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10),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다 서로 “순복”(벧전 5:5)하라는 가르침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즉시 덧붙여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 죄인들이었고 이방 죄인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으로서 무슨 자랑할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두 해로 여기어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에게 유익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방 죄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으며 유대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대부분 불신의 결과로 주어진 죽은 형식을 통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다 같이 죄인이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종족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눅 15:2)는 말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죄인이 할례 받지 않은 죄인보다 더 나을 바 없고 교인으로서의 죄인이 교회 밖의 죄인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침례 의식을 통과한 죄인이 어떤 종교도 가지지 않은 죄인보다 더 나을 수 없습니다. 죄는 죄이고 죄인은 교회 안이건 밖이건 간에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세상의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는 “올바르게 된다”입니다. 더 나아가 라틴어의 의미로 살펴보면 “의롭게 만들다”라는 더 정확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한 사람도 의롭거나 올바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거나 올바르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의롭다고 선언되어 있습니다(롬 7:12).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도 율법 곧 돌비에 쓰여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할지라도 율법을 격하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크게 높혔으므로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나 줄 수는 없는 의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롬 8:3,4참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나니” 그러면 율법을 폐지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그것은 죄를 버리기를 원치 않는 자들의 생각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선언하고 죄를 결코 의라고 말하지 않는 율법을 없애 버리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결코 폐지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2:18참조).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우리는 글로 쓰여진 율법을 읽고 거기에 분명히 나타난 우리의 의무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죄합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더 나아가서 그 요구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그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율법에는 흠이 없고 우리 개개인에게 허물이 있다는 것 또한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는 길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의도 내 마음에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율법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은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출 34:7)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옮기시고 죄인을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과 조화를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에 그들을 정죄했던 율법이 그들의 의를 증거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믿음”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해서 성경의 의미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히 12:2)이시며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롬 12:3)을 나누어 주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리스도는 말씀이십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회개케 하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의 믿음이 연약하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선물을 받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연약한 믿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약하여 질”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믿음에 의존하기를 두려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만큼 강한 것임을 성경은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믿음 외에는 결코 믿음이 없습니다. 그 외에 믿음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은 다 가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의로우십니다. 그는 세상을 이기셨고 또 그 만이 세상을 이길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십니다. 왜냐하면 율법(하나님 자신)이 그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율법을 지키셨고 또 완전하게 지키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살아있는 믿음, 우리 안에 있는 그 생명)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시험한 돌”(사 28:16)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우리의 육신으로)의 이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마 1:23)”이십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각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요 1:12참조). 우리가 그렇다고 믿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성경과 모든 만물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그 사실을 받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당연한 일로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개인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자신의 믿음을 행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천지간의 모든 권세가 그분의 손 안에 있으며 이 사실을 인정할 때에 우리는 그분께서 그 자신의 권세를 그 자신의 방법을 따라 행사하시도록 단순히 허용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더 넘치도록” 행하십니다(엡 3:20).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은 그분 자신의 시험받고 인정받은 믿음이며 그러므로 어떠한 싸움에서도 그 믿음은 우리를 실패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받기 위해 그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다만 예수의 믿음을 받으라 그러면 그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고 우리의 마음을 순결하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완전한 믿음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죄 없는 삶 외에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그러므로 “그 안에 거하라”(요일 2:28)는 하나님의 사랑의 외침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18~21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을 통해 참 그리스도인은 죄 없는 삶 이외에는 다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살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하고 겸비한 마음과 태도로 성경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8절에서 무엇을 헐고 무엇을 세우면 범법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까?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에게 하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에 관한 성경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골 2:10,11).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의 육신으로 “원수된 것” 곧 육적인 마음을 폐지하셨습니다. 그 자신의 것을 폐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것인 죄와 연약함을 폐지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데 헐어지고 멸하여진 것은 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지 못한 육적 몸 곧 육적인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멸하여진 죄의 몸을 다시 세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승리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이미 이루어진 하나의 실제적인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는 우리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믿음이 또한 그 승리를 우리에게 현실이 되게 합니다. 이 믿음을 잃어버린 자들은 그 현실 밖에 놓이게 되고 옛 사람의 죄의 몸(육적인 마음)이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 죄의 몸을 멸하셨지만 각 개인에게는 현재의 개인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19절에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율법이 죽었다는 의미로 하신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완전한 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어떤 사람도 율법에 의해서 죽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율법을 향하여 죽게 됩니까? 그 율법이 선고하는 형벌인 사망을 받음으로 율법을 향하여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은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죄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당한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롬4:25)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아니하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죄로 상한 불쌍한 인간이 존재하는 곳 어디에서나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가 계십니다. 앞서 살펴 본 바에 따라 죄는 개인적인 문제이며 인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죄는 우리가 나면서부터 우리의 모든 체질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으므로 우리의 생명은 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을 가져가지 않고는 우리로부터 죄를 가져 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내 자신의 개인적인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지은 죄 뿐만 아니라 마음 가운데 있는 죄 곧 내 모든 생명 속에 있는 죄, 그 얽매어 있는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악인은 “죄의 줄”에 매어 있고(잠 5:22참조) 스스로 그 죄를 씻을 수도 없다고(렘 2:22 참조)알려 줍니다. 내 죄는 내 자신이 범한 것이며 내 자신 안에 있으므로 그 죄를 나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이 이 분리할 수 없는 죄를 떼어서 그리스도께 지울 수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나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십자가로 지셨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불신과 무지 때문에 자신들이 무거운 죄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상은 그리스도께서 그 죄의 짐을 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모든 세상의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내 안, 내 마음 안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시인할 것입니까?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계셔서 바로 우리 입에 계시며 마음에 계시다는 사실을 시인하며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구세주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죄인의 마음속에 계시므로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도 마음속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직 이 진리를 믿고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실제로 있는 것같이 보고 시인하며 믿고 사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그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죄가 모든 육신 안에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만민에게 전해져야할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예수의 믿음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 안에 계신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그분의 의를 삶 가운데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의로 진리를 막”(롬 1:18)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기를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죄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안에 계시지만 죄인에게서는 시인을 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으로 그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인인 그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자신의 죽음이 되도록 하여 예수의 생명이 그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은 곧 바로 살기 시작하며 이것은 자기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만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셨습니다(요 6:57 참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을 믿는 예수의 믿음은 그가 죽을 때에 삼일 만에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거듭거듭 확신있게 주장하게 한 그러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죽으셨습니다. 그에게 죄를 완전히 이기게 하고 그 결과 사망을 이기는 이김을 주었던(히 5:7 참조) 그 믿음은 예수께서 믿음에 의해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는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히 13:8)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 자신의 믿음을 사용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길을 좇아 우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저 우리는 단순히 그를 받아들이고 시인함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살게 하시는 것 그 일만을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이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만일 의가 율법에 의해서 왔다면 그때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할 의무를 지적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각자의 노력에 의해서 온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말씀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얻어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 안에서만 구원이 있으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온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0,11).
원하는 자는 누구나 그 구원의 은혜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후 6:1)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경계하고 매일의 삶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 2장의 교훈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신 복음은 오직 하나의 복음 뿐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가르친 방법은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외적으로 받는 할례는 이미 믿음으로 받은 의의 표로써 주신 것입니다. 이 할례의 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셨다는 표이므로 만일 우리가 율법을 범할 때에는 그 사실이 조롱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롬 2:25~29 참조).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오늘날에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없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지와 같은 구원론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쓰시고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셨다고 설명하며(갈 2:21, 롬 8:3,4 참조) 구원 받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생명의 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고 행하여 그 율법의 의로움을 보여주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셨습니다.
Galatians chapter 3
갈라디아서 3:1~7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사도 바울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묻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3절 말씀을 히브리 원문으로 살펴보면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요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완고함과 거역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우상에게 숭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옛적에 행해졌던 이 마술과 사술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강신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강신술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영과 교통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사단의 영들과 교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근본 정신인 속임수, 기만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전 9:5)기 때문입니다. 강신술 하는 자와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는 그 자신을 사단의 지배 아래 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신술을 부인하고 비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붙들지 않는다면 앞으로 있을 강한 기만에 휩쓸려 갈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으로써만 이 지구에 다가오는 시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계 3:10 참조).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은 적그리스도의 영인 사단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이 기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 깨달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는 이 구절이 그저 사도 바울이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말이며 그들의 상상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과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이 십자가의 사건을 실제로 볼 수 있었습니다(고전 1:17,18 ; 2:1~4 참조). 이 경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꼭 있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떨어지는 낙엽과 새 잎들이 이 일에 증인이며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있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도 이 일에 증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눈으로 직접 보고 순간마다 그 십자가를 볼 수 있기까지는 복음의 실체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 갈라디아서의 연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눈이 열려 이 복음의 실체를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질문에는 단 하나의 대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다만 듣고 믿음으로써 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요 7:39, 엡 1:13 참조). 그리고 이 질문은 이 서신을 읽을 갈라디아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시작하는 길은 바로 이 길 뿐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창조시에도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운행 곧 생명이 있을 수 없음을 스가랴 4장 6절(“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만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실 수 있으며 사람의 어떤 행위로도 인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호흡을 만들어 내어 살게 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서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그들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그를 영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보고 영접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어리석다는 말은 아주 미약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능력이 없는 것은 그 일을 마칠 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내디딜 힘이 없고 혼자 서 있을 힘조차 없는 사람이 달리기 경주에서 이길만한 힘이 있겠습니까? 누가 스스로 태어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능력이 없지만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신생아가 터트리는 첫 울음소리를 내는 그 연약한 힘도 그 아이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힘과 능력은 우리 자신이 아닌 전적으로 다른 분으로부터 오는 힘과 능력입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우리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성령으로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이 일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성경은 확실하고 단호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4,5). 이 질문으로 우리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의 큰 경험이 있었으며 그 결과로 핍박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그런데 그런 그들이 지금 그리스도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데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곧 진리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 됩니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구하고 있는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믿고 기사를 행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듣고 믿음”으로 다시 말하면 믿음의 순종으로 된 것이었습니다(롬 10:17 참조). 이와 같이 바울의 수고와 갈라디아인들의 처음 경험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경험과 아주 일치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 사실의 증거로 할례 받을 것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그러나 바로 그 주장이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였”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의 의를 가졌었습니다(롬 4:11 참조).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고 그의 믿음이 “의를 행하”(히 11:33)였기에,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6,7).
이 사실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이 지금도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징조를 실제로, 목적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이해가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그들은 의가 선한 행실에 드러난다고 보며 선한 행실은 의를 가져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얻은 의, 일하지 않고 이루어진 선행은 그들에게는 비실제적이고 환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실제적인 믿음의 사람”들로 자처하며 어떤 일을 이루는 유일의 길은 그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은 극도로 “연약할 때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므로 먹으라고 가져다 주는 약조차도 일어나서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에게는 그 일을 해보라는 그 어떤 권면도 비실제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의를 위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 오직 참 믿음을 가진 자들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단 하나 유일의 실제적인 일은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생길 때 우리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라는 말씀을 실제적으로 믿고 따르며 살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8~12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이방인을 위한 복음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갈 3:8).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방이 곧 아브라함을 뜻하며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뜻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전파되었으며 그 복음을 전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은 참되고 유일한 복음인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였던 복음도 같은 복음이며 우리가 가진 복음 또한 아브라함이 가진 복음과 똑같은 복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신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베드로나 바울의 시대에도 전혀 새로운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 백성을 이방인 중에서 취하여 내셨으며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행 15:14~18; 롬 11:25,26 참조).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이방인 중에서 한 백성을 구원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불변의 증거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러한 뜻을 성취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어떠한 이방인도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복음이 아니고는 달리 구원 받기를 바랄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2,33).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행 3:25,26)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의의 축복을 뜻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죄의 용서는 동시에 의의 축복을 가져다 준다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
누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합니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여 보십시요. 성경은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119:1),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 KJV)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라는 말씀이 명백히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속한 자들은 믿음으로 계명을 행하며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을 함께 받는 자들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본성과는 정반대이므로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는 것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의를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행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의로부터 더 멀리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벧후 1:4)을 믿으면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벧후 1:4)며 모든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주는 율법에 기록된 모든 일을 계속 행하지 않는 데에 달려 있으며 축복은 율법을 완전히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되게 믿는다면 정죄를 받지 않고 오직 믿음이 율법에 일치되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그러면 성경이 선한 일을 무시한다고 가르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선한 일을 높이 삽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또한 불신하는 자들을 책망하여 말씀하기를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고 하였으며 디모데에게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고 권면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골 1:10)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예비하시고 이루셨으며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쌓아 두셨습니다(시편 31:19 참조).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이와 같이 선한 일은 행하여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행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오직 선하신 분만이 실행할 수 있으며 그분은 곧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어떤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 큰 은혜인 것입니다(히 13:20,21 참조).
그러면 누가 의인이며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믿음을 통해서 바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요일 5:17) 또한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그러므로 모든 불의는 불법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모든 의는 율법에 순종하는 것임을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의는 우리가 얻어야 할 목적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그 의의 표준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있게 될까요? 그 답으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고 행위로는 전혀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롬 10:10)기에 여하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의인에 대한 이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예외는 있을 수 없으며 중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다른 의인은 믿음과 행위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지고 지탱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보다 위대한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기에 그러합니다(롬 7:12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주 예수를 영접하면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면서 완전히 율법을 이루어 주십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책에 쓰여져 있건 돌비에 새겨져 있건 간에 글자로 쓰여진 율법이며 이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단순히 “이것을 행하라” 또는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이 말씀은 글자로 쓰여진 율법이 생명을 제시하는 조건이며 율법은 행위, 오직 행위만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은 제시된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살펴본 바 지금까지 율법의 요구를 이룬 사람은 전혀 없으며 율법을 행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의 생애에 완전한 순종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움직이는 행위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 그러나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허물과 죄로 죽(엡 2:1)”은 사람은 의를 행할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그리스도만이 그 안에 생명을 지닌 유일한 분이시며 그분만이 의를 행하였고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을 시인하고 영접할 때, 그때는 더 이상 우리가 산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만듭니다. 이러한 우리의 믿음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기에 우리의 믿음이 의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바치며, 살아 계신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게 되면 그 마음은 하나님의 보좌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살아 있는 율법이 우리의 생명이 되며 이 생명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폐지되었다 혹은 변경되었다, 효력이 줄었다라고 주장하는 단 한 절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어떻게 율법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 것인가(칭의)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거룩한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에 대해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가르치기를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된다는 거짓 가르침은 죄인에게 더욱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저없이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한 참된 의로 제시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기초이며 주제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자랑하였지만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랑으로 삼았으며 그가 이와 같이 가르친 율법의 의로 하나님의 이름이 바울을 통해서 영광을 받게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갈라디아서의 연구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이해가 분명히 마음에 새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두 성경절을 통해 사망, 저주, 축복, 구원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이 두 구절은 우리에게 확실한 십자가의 이해와 구원에 관한 깨달음을 갖게 해 줄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함께 연구하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쏘는 것이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이 말씀으로 미루어 사망은 저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리시므로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를 위하여 저주로 삼으신바 되셨습니다. 저주와 사망은 죄로부터 이르게 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갈라디아 3장 10절을 통해서 이미 배운 바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저 살아있는 모습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요 6:53)다고 하시며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죽음 곧 사망의 몸인 것입니다(롬 7:24 참조).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매력적인 죄 속에 숨기어져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사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저주로부터의 구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고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불순종의 저주에서 구속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구속을 받았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옳다라고도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저주는 불순종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갈 3: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롬 8:4)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을 수는 있으나 모든 사람이 다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귀하신 피 곧 참 생명으로 온 인류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율법의 모든 의로운 요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은데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의미이며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쇠사슬을 산산조각을 내셨기 때문에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분의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더 이상 좋고 나은 미래를 위해 헛된 희망을 갖고 또 그것을 위해 애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감옥 문을 활짝 여시고 죄의 포로들인 우리에게 “나오라”고만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의 승리는 곧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승리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는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고후5:21)바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나무에까지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의 몸으로” 짊어지셨다는 것은 그저 피상적인 일이거나 상징적인 일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그 일로 인해 죄들이 그 안에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바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 짊어지신 것은 그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들의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벧전 2:22; 고후 5:21 참조) 사망을 삼키는 무한한 생명의 능력으로 죄를 받으셔서 완전히 삼켜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그의 이 놀라운 생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 속에 있는 온갖 죄로부터 해방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들은 이미 정복되었고 쓰러진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패배당한 원수와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바칠 때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지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도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그의 위대한 사랑이며 온 인류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밝히 보여주신 것
1. 죄와 사망으로 부터의 구속은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2. 복음은 모두 십자가에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 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는 죄에 빠진 인류에게 오직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드러나 계십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하신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울이 알고자 했던 모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로 사람들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주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시는 것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저주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그 저주를 담당하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담당하고 계십니다. 즉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땅에 선고된 저주(창 3:18)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을 받았습니다.(롬 8:19~23 참조)
5.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신 것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신 것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타났기에 그러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저주로 부터의 구원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정복자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저주 그 자체는 십자가를 제시하며 우리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6. 저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지상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 위에는 불완전함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불완전함이 저주입니다. 인간도 불완전하고 아름다운 초목도 그 옛날 하나님께서 좋으셨다고 하시던 그 아름다움으로 보면 불완전한 것입니다(사 26:4 참조).
7. 이 모든 일의 결론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 저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땅과 인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디에나 있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모든 풀잎사귀와 모든 꽃과 과일 심지어 매일 우리 앞에 놓여진 음식물까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인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숨 쉬며 기동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이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이 그가 만드신 모든 만물 안에 나타나 있으며 그 능력이 곧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엡 3:20)인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자들
우리가 죄의 깊음 가운데 있으나 살아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자신께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 심지어는 저주까지도 사실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 됨은 만일 주님을 믿으면 절망의 원인이 되는 대신에 구속의 보증이 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또한 우리가 주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날 것입니다.(고후 4:10,11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후 5:21 참조) 그가 짊어지신 저주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축복은 바로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저주는 범법이므로(갈 3:10 참조) 축복은 우리 각자가 우리의 죄와 허물에서 돌아서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와 사망의 고통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은 무슨 복이었을까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참조). 이 축복은 이방인에게 뿐만 아니라 믿는 유대인에게도 임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이 축복을 받고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며 저주는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가 십자가를 드러낼 때에 바로 그 저주는 주님에 의하여 축복으로 선포되어 집니다. 비록 우리가 죄인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우리의 것이라는 보증이 됩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엡 1:3)주셨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축복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선물을 원치 않았거나 혹은 고의로 내던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외에는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축복을 넘치게 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받고 믿는다면 죄가 우리를 절대로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 깨달아 알아야 하는 그 시대의 진리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성령의 선물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잘못 읽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은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입증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인 것과 구속받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는 일입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시며(요 16:8참조)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며 성령은 진리이시며(요일 5:7)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5:10). 그리스도는 지상의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 증인의 증거를 받을 수 있고 성령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즐거워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 위에 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약속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약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한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기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기업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시며 우리가 그의 자녀들로서 같이 참여하는 약속-한 유업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의의 유업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기를 하나님께 흠없이 드리어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히 9:14,15 참조)시기에 그러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14).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조화되게 하여 아름답게 하나님의 뜻 안에 통일되게 하고자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이 안에 우리들이 잘 조화 되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3:15~18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약속들은 여럿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자손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갈 3:16 참조) 이 자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구원의 방법 곧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받느냐 혹은 다른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에 의해서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은 그들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자신들을 선하게 만들어서 그들 스스로 구원 받으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노력을 도와주는 귀중한 보조자로 여깁니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기를 즐겨는 하나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갈 3:16절은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위와 같은 모든 생각이나 주장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자손들이 아니고 그 자손인 것입니다.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과 육적인 자손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은 영적인 자손에 비교해서만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육적인 자손이란 성경에서 가리키는 실제적인 자손이 아니고 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내쫓김을 받아야 하고 약속의 유업에는 결코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자손은 그리스도께서 “살려주는 영”(고전 15:45)이며 더 나아가서 이것은 실제하므로 실제적인 자손입니다. 이 사실은 세상에서 육체를 가진 인간들이 완전히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또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직 한 계열의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실제적인 자녀들이 존재할 뿐인데 그 자녀들은 바로 믿음에 속한 자들 곧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저주가 없는 유업(기업)
“그리스도께서…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 이 “성령의 약속”은 새롭게 된 다시 말하면 저주에서 속량된 모든 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손에서 갓 나와 새롭고 모든 면에서 완전한 땅을 인간이 소유하도록 주셨습니다.(창 1:27,28,31 참조)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여 스스로 저주를 취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인간과 피조물의 저주를 몸소 담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이 실제의 사건은 원래 계획하셨던 대로 영원한 소유가 되도록 땅을 저주에서 구속하시며 또한 인간도 저주에서 구속하시어 이러한 유업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여 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 영생의 선물이 유업의 약속 안에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한 기업”(창 17:7,8)으로 이 땅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의의 기업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믿음의 의에 의해서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와 영생과 그 가운데서 영원히 살 땅 이 모든것은 모두 약속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의, 영생, 영원한 땅) 우리가 소망하고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속하는 능력은 창조의 능력,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십니다.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그때에는 “다시 저주가 없”(계 22:3)는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약속의 언약과 유업
자손이라는 말은 단수인 반면에 약속이라는 말은 복수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약속은 어떤 하나의 약속이 아니라 약속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지 않은 것을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아브라함이 믿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 3:17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은 동일한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가나안 땅을 주며 그것과 함께 온 세계를 영원한 소유로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3:18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그것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맺은 언약이 어떤 자들에게는 그저 약속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가치의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을 하나님에게도 적용시키는 잘못된 관습을 가지고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는 어떤 거래도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들의 몫을 이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5,36).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짐승과 새들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에 답하여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창 9:9~16 참조)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은혜를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을 선물로 약속하십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 주님을 완전히 시인하려고 할 때에라도 하나님과 동등하게 거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 모두는 겸허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 대해 알려주시기를 간구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거래하기를 원한다면 누구나 하나님 자신의 조건하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을 받는 우리의 기초는 바로 우리들은 진흙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토기장이가 되신다는 그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또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며 또 모든 것이시며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며, 거래를 원하는 자들은 바로 이 사실에 기초하여 거래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하나님의 맹세로 확증되었습니다. 그 약속과 맹세는 우리의 소망의 근거이며 강력한 위로가 되며 맹세는 그리스도를 보증과 담보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셨을 때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동시에 온 우주를 담보로 주신 것입니다. 이 맹세는 죄를 피하여 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과 언약의 관계
언약과 약속을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땅, 곧 새롭게 창조된 모든 땅을 의미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오직 의만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땅에 여전히 있을 것이므로 이 약속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 이 약속이 확정됩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갈 3:15)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루어진 이 일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완전하신 영원한 의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으로 보장되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맹세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어떤 새로운 것을 소개할 수가 없습니다. 약속에 의하여 유업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으므로 만일 430년 후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 유업을 얻어야 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약속은 효력이 없을 것이며 언약을 무효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전복과 그의 존재의 끝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존재를 들어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유업과 그 유업에 필요한 의를 주시기로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복음은 과거와 미래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완전하고 충만하였습니다. 그 조항이나 조건의 가감이나 변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 후에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참 복음에서 어느 하나를 더하거나 뺄 수도 없으며 아브라함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어느 누구에도 요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백 삼십 년에 대한 이해
출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란을 떠나온 때로부터 215년 후에 야곱이 애굽에 들어갔으며 그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215년을 지낸 후에 애굽을 떠나는 출애굽 역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 3:19~2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기업은 완전히 약속에 의해서 주어지며 확정된 약속은 변경될 수 없고 조금이라도 가감할 수 없는데 왜 430년 후에 율법이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다시 말해서 왜 율법이 생겼습니까? 그러면 율법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 안에서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5:20).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롬7:13)입니다. 율법은 가장 두렵고 엄숙한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그들의 불신으로 약속된 유업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경고로 주셨습니다(출19장 참조). 그들은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14:23)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업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므로(롬4:13)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은 그 유업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유업의 소유에 필요한 의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의가 율법에서 오지는 않지만 의는 율법의 증거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롬3:21). 다시 설명하면 그들이 믿음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며 그 이유로 유업을 상실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믿었더라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새기신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율법을 새겨 두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하면서도 여전히 약속된 후사라고 주장했을 때에 그들의 불신은 죄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장 눈에 띄는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범법함을 인하여”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의 불신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시내산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롬5:20)은 그 율법이 그때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있었고 또 그가 그 율법을 지키었음을 창세기 26장 5절(“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내산 에서 율법을 선포하시기 한 달 여 전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가 아니 지키는가를 시험하셨다고 출애굽기 16장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의 “더한 것이라”고 번역한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9절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에서 “말씀하다”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5장 22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큰 소리로 십계명을 말씀하시고 “더 말씀하시지 아니 하”셨다는 단어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범법함을 인하여 말씀하신 것이라”입니다. 이것은 곧 죄를 책망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신뢰로 인해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불평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할 수 있고 그 분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6:28)라고 물은 그들의 자손들과 동일한 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자기 신뢰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 하느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자신의 의를 하나님의 의와 동일한 것으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롬10:3 참조).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약속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율법을 주셔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4). 시내산에 있었던 천천만만의 천사들(시68:17 참조)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에게 복음의 전파가 맡겨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에 관련된 모든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땅의 기초가 놓일 때에 그들은 노래하였으며(욥38:7 참조) 인류의 구세주가 탄생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기뻐 찬양을 드렸습니다. 스데반은 그의 증언에서 산헤드린 회원들을 향하여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행7:51~53)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들은 “능력이 있”(시103:20)으며 그들이 율법을 선포하는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이 율법의 선포는 크고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중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2:5) 바로 우리의 구세주 이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그리스도께서는 원수 됨을 없애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롬8:7). 그는 우리의 화평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엡2:14~16). 그분은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벧전3:18)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롬5:1,2; 엡2:18 참조). 중보로서의 그리스도의 일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그는 중보가 되셨으며 우주에 죄가 없고 속죄가 필요 없게 될 때에도 중보자가 되실 것입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7).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이며 생명이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생명이 모든 피조물에게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 온 우주에 충만하게 되는 중보이시며 길이십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 처음으로 중보자가 되신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그 분은 중보자이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가 구속을 얻는 것입니다(골1:14~17참조). 우주를 충만하게 하고 붙들고 있는 능력은 우리를 구원하는 그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 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21).
율법은 약속을 거스리지 않음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고후1:20 참조) 율법과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에서도 율법이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율법을 주신 것이 언약에 새로운 사항을 더 넣은 것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확증을 했으므로 더 넣거나 빼거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소용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어느 때나 변함없이 약속을 거스리지 않으며 또 새로운 사항으로 율법을 부가하여 넣은 것도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율법이 언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약속에 이 율법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 이것은 하나님께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행7:8)을 때에 그에게 행하여진 것을 가리키는 말씀(롬4:11; 2:25~29; 빌3:3 참조)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율법은 약속을 높임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세상을 유업으로 상속 받으리라”는 약속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롬4:13)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께서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사51:7)에게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의”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약속된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의가 됩니다. 그러나 이 의는 율법의 행위로 얻지 못하고 믿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약속도 더욱 크게 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의를 주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서의 엄숙한 장면은 하나님의 율법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과 위엄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맹세를 기억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위대함을 계시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기로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선포하신 “큰 음성”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자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큰 음성이었습니다(사40:9 참조). 하나님의 계명은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계명은 반드시 이와 같은 약속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죄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증인 것입니다.
생명과 의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절).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의는 생명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이나 생명이 없는 이론이나 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 두 돌비에 쓰여진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율법이 쓰여진 돌비도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모든 율법이 완전하나 생명이 없는 문자들이 변하여 살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율법의 문자만을 받는 사람은 “정죄의 직분”과 사망을 가질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산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생명과 평안이 됩니다. “영의 직분”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을 때에 율법이 시인하는 의의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갈라디아서 8절과 22절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복음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둔 같은 성경에 의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두었다”는 말은 23절에서와 같은 글자 그대로 “매인다”는 말입니다. 법에 의해서 가두어진 사람은 감옥에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나라에서도 범죄자는 법에 의하여 그를 붙잡아 가둡니다.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항상 작용하고 있으므로 사람이 죄를 지을때에 즉시 그를 가둡니다. 이처럼 온 세상은 다 마찬가지로 매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롬3:23,10)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신 이유와 목적은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시102:19,20)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고 그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6,7). 얼마나 감사한 약속이신지요! 여기에, 개인의 경험에서 아직까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알지 못하는 한 죄인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는 이런 기쁨과 자유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난 날에는 의심이 많았고 망설임이 있었으며 쉽사리 자기 변호를 늘어 놓았지만 죄를 깨달은 그 때에는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될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이 계시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옥에 갇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알게 될것입니다. 율법의 돌비가 그의 생명을 박살내는 것 같이 느끼게 되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 까 하나이다”(출20:19)라고 느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그가 받도록 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갇혀 있었다는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그에게는 생명을 얻은 큰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을 때에 우리를 둘러싼 감옥 문은 즉시 활짝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큰 기쁨으로 “우리 혼이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 났도다”(시124:7)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율법아래 매인 바 되고
이제 우리는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해서 임을 배웠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으며 후에 계시될 믿음이 계시되기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롬14:23 참조).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죄 아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며 의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율법 안에서 행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몽학 선생이 되어
새 번역에서는 몽학 선생 대신에 가정교사로 번역되어 있으며 독일어, 스칸디나비아 성경 번역본에는 “교도소의 감독”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정교사로 나와 있습니다. 예전에 가정교사들은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기 위하여 매를 때리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가지의 의미를 잘 살펴서 보면 율법은 진정한 가정교사이며 죄 아래 있는 죄인들을 감독하는 몽학선생이자, 감독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그들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은혜스러우시지만 죄인을 죄 없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출34:6,7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그들의 죄를 떠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십니다. 죄인이 이 구원의 길을 따라갈 때 율법은 더 이상 그들을 대적하지 않으며 더 이상 그들을 가두지도 않습니다. 사실적으로 율법은 죄인에게 감옥을 만들어 줍니다. 죄인을 가두고 불편을 느끼게 하고 생명을 짓누르는 죄책감으로 압제를 가합니다(잠5:22,고전15:56 참조). 아무리 벗어날려고 노력을 해도 헛된 일 뿐입니다. 아무리 율법과 친구가 되려 하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하더라도 그의 죄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더 나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율법은 몽학 선생이 되어 죄인을 도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로 몰고 갑니다. 죄인은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자유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하나님의 의가 되기에 그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1:25)이 있음을 알려 주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까!
믿음이 오기 전에
이 구절이 믿음이 올 어느 때가 있다는 그런 뜻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곧 우리 안에 율법을 이루므로 더 이상 율법을 대항하지 않고 율법에 복종하게 하는 약속의 말씀을 받을 때에 바로 그 때에 믿음이 그 사람에게 이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살펴 보면 아벨의 시대이래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자유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정해진 시간은 “지금”, “오늘날” 뿐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로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후6:2,히3:7,8)는 사도 바울의 음성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옷 입었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함께 죽지 않으면 안됩니다. 침례는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갈2:20 참조)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옷 입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며 우리는 완전히 그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모든 것에 권리를 가지며 그리스도가 앉아 계시는 “하늘”에 갈 권리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물론 침례가 하나의 실제이며 단순히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침례를 받는 것은 단순히 물 속에 잠기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인류는 어떠한 차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이것이 복음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같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다 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온 인류는 어떤 인종이나 어떤 상태 하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합니다.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고 그리스도는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럿을 가리켜 네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직 한 자손 밖에 없으며 그 자손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곧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도록 인도 할 수 있는 마지막 영혼이 그를 받기까지는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받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유업을 받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유업을 받을 수가 없기에 그러합니다. 자손은 하나이고 둘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기를 원하지 않노라”고 말한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때에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유14)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자손은 완성될 것이며 그 약속은 성취가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율법은 충실히 죄인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찌르는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거나 또는 완전히 거절하기까지 쉼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율법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며 불평을 그치고 율법의 요구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약속에 의한 유업을 받을 자로서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될것입니다.
Galatians chapter 4
갈라디아서 4:1~1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4장의 주제
어린아이가 모든 것의 상속인이라 할지라도 나이가 찰 때까지는 종과 다름이 없습니다. 만일 나이가 차지 않는다면 사실상 유업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유업의 몫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모든 생애는 종으로써 살아야 할 것입니다.
1절의 “어렸을 동안”으로 알려진 상태는 5절의 “아들의 명분”을 받기 전의 상태인 것을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을 받기 전, 곧 우리가 개심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개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초등 학문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고 말씀하신 경고에 귀를 여십시오.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1~3)인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3장 22~24절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믿음이 오기 전 우리가 율법 아래 곧 “죄 아래” 있었던 때와 같은 매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엡 2:12) 상태를 뜻합니다.
누구나 유업을 이을 자가 될 수 있음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 “자녀들”로 언급한 자들의 상태가 이런 것이라면 어떻게 그들을 유업을 이을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의 후손이라는 의미에서 누구나 유업을 이을 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원칙적으로도 추수 때까지는 누가 자손이 되는가 하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믿음이 오기 전”에 비록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율법 아래 있어 주인의 감시를 받으면서 갇힌 바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탕자들일지라도 여전히 그들을 자녀들로 여겨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이 집행유예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시인하여 그의 참 자녀가 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죄의 종으로 죽어야 할 것입니다.
때가 차매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찼을 때에 오셨습니다. 이때는 메시야의 초림이라고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속은 각 시대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메시야는 창세 전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셨습니다. 만일 이 세대나 아니면 종말 전 마지막 때에 나타나시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을지라도 복음에는 전혀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항상 살아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히 9:25; 13:8; 9:14)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희생은 지금이나 모든 시대를 막론하여 동일한 능력과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으므로 그분께서는 틀림없이 인간이셨습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쓰시고 다른 사람과 같은 생애를 사셨고 “여자에게서 난 사람”의 운명인 질병과 고난을 모두 당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여 부르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자신을 온 인류와 영원히 동일시 하셨으며 이 연합의 띠는 결코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에게서 나셨으므로 율법 아래 나신 것이 당연합니다. 곧 이와 같은 상태가 온 인류의 상태이며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히 2:17)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과 그 정죄로부터 구속하시므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도록 하십니다.
성령의 증거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서까지라도 기뻐하며 실망이 없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롬 5:5)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롬 8:16)하시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요일 5:10)가 있게 됩니다.
이후로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니,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니” 두 종류의 자녀들이 있는 것처럼 두 종류의 종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장의 처음 부분에서의 “자녀”라는 말은 “장성한 자”(히 5:14)가 아니므로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진노의 자녀로 있는 동안은 죄의 종이며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종이지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종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종입니다. 종의 품성은 그 섬기는 주인을 따릅니다. 본 장에서의 “종”이라는 말은 실제로 자녀들이 되는 하나님의 종들에 적용하여 쓰는 말이 결코 아니며 죄의 종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종과 아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종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고 그 자신조차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구별 짓는 특성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탕자가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고 있을 때는 종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처지로 그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면서 종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도 아들이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를 알아보고 달려가 만났으며 그를 아들로 영접하였습니다. 그가 모든 상속권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상속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녀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상실하였고 유업을 탕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영접하시며 그리스도가 가진 것과 똑같은 권리와 특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권력자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가난한 농부만큼 많은 소유물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현재의 고난에 우리와 하나가 되시는 것은 우리로 그의 현재의 영광에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교의 종노릇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고전 12:2)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인들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은 원래 이방인이었고 우상을 숭배하였으며 타락한 미신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종노릇은 앞장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이 율법 아래 갇히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모든 개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종노릇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2, 3장에서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주님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한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0). 만일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이방인이 되며 중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배교하면 즉시 이방인이 됩니다. “의의 태양”의 빛을 보았고 자유의 기쁨을 누렸던 자들이 감옥으로 되돌아가 쇠고랑에 매이며 심지어는 그 쇠고랑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이 경험을 얼마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슬픈 일은 사람들이 심지어 사망까지도 좋아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혜자의 경고를 꼭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 8:36).
이방의 풍습을 지킴
갈라디아서를 받아보는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갈라디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교에서 개종하였으며 개종하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행한 종교 행사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에 유대인의 풍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옛 이교 풍습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신 18:10, 11 참조). 그러나 그들을 다른 길로 이끈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까? 이 “거짓 형제들”-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갈라디아인들을 유혹하여 그리스도를 떠나게는 하였으나 그들을 유대인의 규례에도 머물도록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갈라디아인들은 이전의 이교 미신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만일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도록 어떤 다른 것으로 이끌 때 그가 어디로 돌아가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도 자신을 신뢰하고 육신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은 우상을 만들어 절하는 이방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대신 자신의 행위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영리함과 스스로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능력 외에는 다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랍니다.